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우청우탁(寓淸于濁)⑬ -푸른 빛 나는 것들, 은유

은빛강 2012. 3. 11. 15:38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⑬ - 푸른 빛 나는 것들, 은유

작성: 양선규 2012년 3월 11일 일요일 오전 9:32 ·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⑬ - 푸른 빛 나는 것들, 은유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 중의 하나가 ‘상상작용(imagination)’이다. 그것 없는 인생은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다. 명색이 소설가인(전직?) 내 인생에 지금 앙꼬가 없다. 상상작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심심하다. 나이 들면 누구나 가는 해외여행을 다녀온 것도 까마득한 옛날이다. 방학이 되고, 주변 사람 중 누구라도 좀 안 보인다 싶으면, 여즉없이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는 보고다. 미국이고 호주고 유럽이고 인도고 이집트고 하다못해 홍콩이나 일본이라도, 경쟁적으로, 모두 다녀들 온다. 어떤 이는 한 달에 두 탕씩도 뛴다. 우리집만 꿀먹은 벙어리다. 돈을 가진 집안 실세(?)께선 늘 “당신 혼자 다녀오라니까!”, 그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을 종결한다. 도무지 인생에 상상작용이 없는 분인 것 같다. 무엇이라도 보고 즐기는 게 있어야 하는데, 해외 문물도 콘서트도 영화도 문예도 그 분에게는 아무런 상상작용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드라마만 본다). 그래서 홧김에 머리를 깍고 왔다. 완전 삭발을 하려다가, 나이도 있으시고 하니 ‘반삭’으로 하시라는 권선생(단골 미장원 스타일리스트다)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1cm 정도는 남기고 다 잘라(밀어)버렸다. 영락없는 노스님 모습이다(네 번 타는 보일러?). 아내가 그 모습을 보고는 깔깔 웃더니 “왜 그러는데? 노망도 아니고. 하긴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귀여웠을 텐데...” 한다. 그래서 말했다. “밖으로 못 나갈 바에야 안으로나 한 번 쎄게(?) 들어가 볼려고.” 그 안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냅다 내질렀다. 그러면서도 일면 약간 찔리는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내가 너무 조급했나?

조급하다는 것은 늘 신경증이라는 거다. 신경증은 우리 상상체계에 모종의 버그(바이러스)가 들었다는 이야기다. 필요 이상으로 가동되는 부분이 생기고, 건너뛰는 부분도 생긴다. 대체로 시계의 초침과 같은 템포로 상상이 이루어진다. 정당한 추리와 직관에 필요한 시간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조급증이다.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상상작용인데, 그것에도 정해진 급수가 있다. 이를테면 조급한 것과 농익은 것, 그 중간쯤 놓인 것 등등이 있다. 그 중에서 ‘조급한 것’들이 늘 문제다. 생각이 앞서서(곁가지 생각이 많아서?), 해서는 안 될 말과 일들을 그냥 저지르는 경우를 종종 본다. 제가 눈치가 좀 없어서요, 조급증 환자들은 보통 그렇게 말한다. 자기도 안다는 거다. 그럴 경우는 영락없는 중증 신경증이다. 콤플렉스의 특징 중의 하나가 그거다. 알면서, 그것 때문에 골치 아프다고 하면서, 끝까지 그것을 사랑한다. 자기들은 싫겠지만, 그들은 꼭지가 덜 떨어진 인간, 미완성 교향곡, 속속들이 불량품 인간들이다. 겉으론 멀쩡해도, 안으로는, 상상기능에는, 피멍이 들어도 깊게 들었다. 그들에게는 기본적 인성으로서의 ‘타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갖추어져 있질 않다. 목전의 사익(私益)만 본다. 그걸 보고는 아예 참지 못한다. 사익을 취한 결과에 대해서는 일절 반성이 없다. 역지사지는커녕, 모든 사후작용은 자기합리화를 위해 봉사한다. 그렇게 심보가 고약한 상황을 ‘눈치가 없다’는 한 마디로 다 덮으려 한다. ‘정의론’이 유행하고 나서부터는 또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즐겨 입에 올린다. 그게 조폭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라는 걸 모른다. 가관이다.

나도 젊을 때 그런 심보가 남들 못지않았다. 내 생각만 했다. 밖에서는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내 일신이나 가내(家內) 사정일 때는 전혀 숙고할 시간을 두는 일이 없었다. 돈이 얼마나 들던 라식 수술이 필요하다 싶으면 그 다음날 바로 병원에 갔다. 임플란트가 처음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친구가 아직 기술이 덜 여물었을 때 찾아가서 막무가내로 심으라고 강요했다가 7, 8년을 몸고생, 돈고생으로 보냈다. 그래도 그런 것들은 내 몸에 관련된 것이어서 아내가 굳이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밖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하나 없이 다 클레임을 걸었다(나의 가장 큰 에러는 가옥의 매매와 관련된 것이다. 자세한 것은 약한다). 제발 생각 좀 하고 나서라는 거였다. 그로 인한 불화도 누차 겪었다. 결국 그 상상작용의 조급성 때문에 아내와 많이 부딪친 셈이다. 재미있는 건, 아내에게는 그런 게 애초에 없다. 조급이고 뭐고가 없다. 아예 상상작용이 없는 아내는 세상이 일체 정물화다. 움직이는 게 없다. 그러니, 나의 조급증은 그녀에게는 늘 청천벽력이다. 순간적으로 닥치는 내 결단(?)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항상 분노와 용서의 시간이 요구된다. 물론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오늘의 삭발 행사(?)도 그랬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저지를 일이다. 그래서 그녀가 많이 놀랄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리 예고제를 실시했다. 이미 대여섯 달 전부터 깍는다, 깍는다, 염불하듯이 입에 달고 살다가 드디어 오늘 결행했다. 그래서 좀 덜 놀란다. 오히려 유쾌하게 받아들인다. 개 한 마리 키우자는 것도 지금 2~3 년째 뜸을 들이고 있다. 내일이라도 당장 한 마리 얻어 와도 그리 크게 놀랄 일은 아니지 싶다. 동물 키우는 일에 있어서도 젊어서는 항상 아내에게 놀라움만 선사했다(졸작 『고양이키우기』 참조). 방과 아파트 베란다에서 육해공군을, 집단군으로, 합동으로 양성했다. 십자매는 번식률이 너무 좋아서 수백 마리까지 불어난 적도 있었다(그래서 졸지에 부업이 된 적도 있었다). 수조 비슷한 어항에서 돔까지 양식했다. 나중에는 내 팔뚝만한 것들이 어항 안에서 방안의 동태를 힐끔거리며 살폈다. 모두 아내의 동의 없이 혼자 저지른 것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모든 습벽이 다 사라졌다. 무엇이든 하고(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상황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모든 에너지들이 순식간에 다 소진되고 말았다. 아내의 그 무(無) 상상작용증이 내게 전염이 되고 만 것일까? 검도 하나로 천하가 일망타진 된 듯했다. 일단, 마음은 편했다.

요즘 들어서는 사정이 역전되어,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을 좀 만들어야겠다는 조급증이 새롭게 든다. 죽을 때 후회하는 세 가지, “참을 걸, 베풀 걸, 즐길 걸” 중에서 마지막 ‘즐길 걸’ 부분의 후회가 가장 막심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드는 탓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하다. 로맨티스트도, 아이디얼리스트도, 테러리스트도 아닌 리얼리스트로 살아온 댓가가 고작 이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더 억울하다. 억울할 일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무언가 저질러야 할 텐데 현재로서는 막막하다. 할 일이 없다. 큰일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일단, 안에서부터 정지 작업을 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나 할까? 아래 소개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상작용 중의 한 극단, 이미지 시에 대한 설명이다. 시인도 아마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던 것 같다. 조급증을 내서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시다. 시에 관심 없는 분들은 건너뛰시는 게 아마 덜 억울한 일이지 싶다.

푸른빛과 싸우다

― 등대가 있는 바다

등대가 보이는 커브를 돌아설 때 사람이나 길을 따라왔던 욕망들은 세계가 하나의 거울인 곳에 붙들렸다 왜 푸른빛인지 의문이나 수사마저 햇빛에 섞이고 마는 그곳이 금방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다 밝음과 어둠이 같은 느낌인 바다

바다 근처 해송과 배롱나무는 내 하루를 기억한다 나무들은 밤이면 괴로움과 비슷해진다 나무들은 잠언에 가까운 살갗을 가지고 있다 아마 모든 사람의 정신은 저 숲의 불탄 폐허를 거쳤을 것이다 내가 만졌던 고기의 푸른 등지느러미, 그리고 등대는 어린 날부터 내 어두운 바다의 수평선까지 비추어왔다.

돛이 넓은 배를 찾으려고 등대에 올라가면 그 어둔 곳의 바다가 갑자기 검은 비단처럼 고즈넉해지고 누군가가 불빛을 보내고 그의 향로와 내 부끄러움을 빗대거나…… 죽은 사람이 바다 기슭에 묻힐 때 붉은 구덩이와 흰 모래를 거쳐 마침내 둥근 지붕 생기고 그 아래 파도와 이어지는 것들…… 혼자 낡은 차의 전조등 켜고 텅 빈 국도를 따라가면 고요를 이끌고 가는 어둠의 집의 굴뚝이 보인다, 낯선 이가 살았던 어둠, 왜 그는 등대를 혹은 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가

바다를 휩쓸고 지나가는 햇빛은 폭풍처럼 기록된다, 그리고 등대

(송재학, 『푸른빛과 싸우다』, 문학과 지성사)

한번 읽고서는 시인이 무슨 뜻을 전하려는지 금방 알 수가 없다. 그 이유를 다른데서 찾으면 안 된다. 시인은 아무나 그저 한번 후딱 자기 시를 읽고 지나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조급증 내지 말고, 생각해야 한다. 시를 읽을 때, 주로 섣부른 전문적 독자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이기도 한데, 자기 문맥으로 시가 들어오지 않으면 ‘난해하다’는 등의 이유로 쉽게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를 쓰면서 시인이 보낸, 아름답거나 절망적인 그 시간들을 반드시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시인은 그저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는 입에 넣기만 하면 자기가 알아서 녹는 달콤한 초콜릿이 아니다(그 안에 깨물어 먹어야 할 아몬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시를 읽어야 한다. 또 한 가지, 시를 읽을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 시는 뜻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뜻으로 매겨지지 않는 그 어떤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은 오히려 그 쪽에 관심이 더 많다. 언어라는 것이 뜻에 목을 매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뜻에서 출발하는 것일 뿐, 시인은 뜻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추구한다. 시어의 총체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것은 말뜻(Sense), 느낌(Feeling), 어조(Tone), 의도(Intention) 등이 두루 고려될 때 비로소 시의 의미가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푸른빛과 싸우다’라는 이 시, 이 기록을 남기는 발화자(시인)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두 가지 정도의 큰 방향이 가능하겠다. 하나는, 마치 화가가 풍경화를 그리듯이, 시인도 ‘등대가 있는 바다’를 서정적으로 멋지게 한번 그려보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 방향에서라면 이 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상징들을 음미하면서 우리도 느긋하게 등대가 있는 바다를 한번 그려보면 된다. 그것으로 끝나면 그냥 끝내면 된다. 만약, 그러고 말기에는 무언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 ‘그림’들에 다시 한 번 내 안의 물감으로 덧칠을 해 보면 된다. 이 시가 ‘풍경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내면의 성찰’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는 느낌은 ‘푸른빛과 싸우다’라는 제목에서부터 든다. 삶과 죽음을 하나의 ‘수평선’ 위에서 바라보는 ‘삶의 등대지기’를 자처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것을 놓아버린 자의 허심(虛心)이 발산해내는 아우라도 좀 있는 것 같다. 그런 느낌을 출발점으로 해서 이 시가 어떤 식으로 ‘성찰’의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내용은 어떤 것인지를 한 번 살펴보자.

시인의 의도를 ‘내면 성찰’ 쪽에서 살피려면 우선 그가 내세우는 ‘푸른빛’의 의미부터 알아야 한다. 사전적 의미의 ‘푸른빛’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함축적 의미는 사전에 없다. ‘싸움’의 대상이니까 ‘즐거움’보다는 ‘고통’의 색깔일 텐데 우리는 그 ‘고통’이 어떤 내용인지 알 수가 없다. 얼핏 보니 이 시에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적 삶이 서로 대립적인 그 무엇으로 설정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데, 과거의 기억 그 자체가 고통인지, 아니면 현재의 삶을 아프게 반추(반성)하도록 강요하는 과거의 기억이라서 현재가 고통인지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시인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이리저리 독자를 미로 속으로 안내하는 것을 보면, 시인은 어쩌면, 그런 사실적인 것(원인)에 관심하지 말고 ‘고통’ 그 자체에만 집중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고통 없는 자는 내 시를 읽지 말기를 바란다’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시인이 이 시를 쓴 진짜 목적인지도 모르겠다. 시 내용은 그 다음 문제고, 시인은 고통(기억)을 잊지 않는 삶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에는 이른바 비유와 상징이 개인적인 경험,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짜여있다. 특히 ‘나무’와 ‘등대’는 전적으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이미지들이어서, 그 상처의 근원을 모르는 독자들이 쉽게 의미의 그물을 짜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첫 줄부터 그렇다. ‘등대가 보이는 커브를 돌아설 때 사람이나 길을 따라왔던 욕망들은 세계가 하나의 거울인 곳에 붙들렸다’라는 말을 ‘등대가 있는 바다(세계의 거울)에 도착하자 나는 망연자실했다(세속적 욕망들의 행진이 일순 정지했다)’라고 읽고 싶은데, 그 뒤를 보면 ‘왜 푸른빛인지 의문이나……금방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다’라고 독자 쪽의 의미화를 고의로 방해하는 듯한 어깃장 문맥을 설정하고 있어 그런 읽기가 쉽게 만족을 얻지 못하게 만든다. 다만, ‘왜 푸른빛인지 의문이나’라는 말을 위안으로 삼아 다음 줄로 넘어갈 수밖에 없겠다. 아마 시인은 그 장소에서 ‘상처 입은 주체’가 되는 자극(충격)을 경험한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푸른빛’으로 감지하고 있는 것 같다.

둘째 연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내 하루을 기억하는’ 것은 우선 ‘바다 근처 해송과 배롱나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 나무들은, 특히 밤이면, ‘잠언’처럼 ‘나’에게 다가와서 ‘기억’을 환기시킨다. 그것이 괴롭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이어서 ‘고기의 푸른 등지느러미’, ‘등대’, ‘내 어두운 바다의 수평선’과 같은 ‘내 하루를 기억’하는 것들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의미화하고 있는 과정을 듣는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말한, 그런 식의 사후작용(事後作用)이 어떤 의미화를 이루어내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그 과정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을 말할 뿐이다. 시인은 앞에서 ‘푸른빛’이라고만 말하고는 더 이상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내용은 독자가 알아서 채워 넣으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결국 자신의 고통으로 환치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될 수 없으니 시인의 그런 말하기 태도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둘째 연까지 읽어도 여전히 ‘푸른빛’의 내포가 윤곽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마, 과거의 어떤 기억과 시인은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한 마디 말로 요약될 수 없는 것이어서 그저 시인은 ‘푸른빛’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셋째 연으로 가 보자. 셋째 연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은, 등대에 오르는 것이 과거의 기억인지 현재의 경험인지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시인에게는 바다를 바라보는 경험이 ‘검은 비단’과도 같은 심리상태를 선사하는 것임을 알리고 있다. 무겁고 부드러우며 균질적인 매끄러움이 있는 세계, 안정감이 있는 어떤 심리적 에너지가 운행되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시인은, 그런 바다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이라는 정서가 환기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 다음 부분에서는 죽음을 관조하고(시인은 바닷가 무덤을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지금도 ‘기억’ 혹은 ‘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 심정을 반추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 ‘왜 그는 등대를 혹은 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가’라는 말이 이 시를 주제의 차원에서 대표하는 말이라고 해도 지나친 것은 아닐 듯싶다. 여기서 ‘등대’는 넷째 연에서 그것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어린 날’의 ‘기억’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고 있다.

넷째 연은 그 날, ‘푸른빛’을 만나던 그 날의 심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가 있다. ‘햇빛’이 ‘폭풍처럼 기록된다’는 것은 그만큼 주체가 입은 상처의 흔적이 컸다는 뜻이다.

이 시를 읽고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의미의 영역은 아주 협소하다. 시인이 스스로 ‘상처 입은 주체’임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시인이 그것을 감추는 것을 통해 시의 형식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고 있는 내용과 관계없이 우리는 그러한 ‘시의 형식’을 통해 ‘주체의 분열’이라는 상황을 감지할 수 있다. 자기 분열이 주는 이화(異化)의 고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 차원이라면, 시인은 자기 분열이 주는 이화의 고통을 ‘푸른빛’으로 상징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푸른빛’과 싸운다는 것은 결국 시인 자신이 새로운 자기통합의 과정에 들어가 있다라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제를 찾아보자. 시에서 주제는 항상 마지막 주자다. 단체전의 주장이다. 주장이라고 늘 어깨가 무거운 것은 아니다. 앞에서 승부를 결정지으면 주장의 경기는 그저 ‘폼생폼사’일 수도 있다. 시에서 주제의 위상이 딱 그렇다. 그것이 승부를 결정짓는 수준이라면 그 시는 일류 시가 아니다. 하이데거의 ‘일상성(日常性)과 본래성(本來性)’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 좀 쉬운 해설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보다 실존적인 층위에서 포괄적인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포괄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가 넓은 만큼, 뜻 전달의 모호성이 강한 이 시의 ‘설명과 이해’에는 오히려 적절한 ‘서술어’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그것을 비본래적으로 사용하여 대지 위에 문화라는 울타리를 건설하고 뿌리 없는 불안정한 생존 조건을 극복하여 일상성이라는 안락한 거소(居所)를 이룩하였다. 그러한 일상성 속에서 사는 일상인으로서 그는 오랫동안 어머니인 대지를 망각하고 자신을 오히려 문화의 테두리 안에 길들임으로 해서 울타리의 존재마저도 잊고 있었다. 그의 생활방식은 그러므로 근본적인 의미에서 볼 때 본래성으로서의 자연인 대지와의 단절을 심화시키는 비본래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자연과의 단절은 비록 삶의 표면에 있어서는 안락하고 평화스러운 것이었으나, 때때로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동안에 자신의 깊은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불안은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근심이나 걱정과는 달리 일정한 대상을 갖고 있지 않은, 알 수 없는 무(無)로서, 근원적인 물음에 부딪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이 불안은 그러므로 비본래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오히려 배반했던 대지에 대해 가지는 그리움이요, 또는 망각하고 있던 본래성으로부터 흘러오는 거부할 수 없는 종소리와 같은 것으로서 일상언어(비본래적인 언어)를 갖고 사유하는 그에게 일상성에 대한 배반을 요구하는 불안이다.” (하이데거, 이진흥, 『한국현대시의 존재론적 해명』에서 재인용)

위의 인용문을 보면 「푸른빛과 싸우다」에서 왜 ‘푸른빛’의 실체가 모호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는지가 설명이 된다. 그것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동안에 자신의 깊은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무들은 잠언에 가까운 살갗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도 저절로 이해가 된다. ‘나무들은 내 본래성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라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정신은 저 숲의 불탄 폐허를 거쳤을 것이다’라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되는 것이리라. 본래성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우리는 모두 ‘불탄 폐허’ 위에서 ‘안락한 일상성의 거소’를 지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는 시인의 일상성이 ‘본래적 자아’ 혹은 ‘불안’을 만나 ‘배반’을 강요받았던 경험에 대한 진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시인에게는 특히 ‘일상성에의 몰입’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일 수가 있다. 그는 타고난 ‘대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푸른빛과 싸우다」의 시인은 ‘대양(大洋)의 아들’을 자처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대양’과 ‘대지’가 그저 이음동의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를 이가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