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우청우탁(寓淸于濁)⑮ - 보는 자는 슬프다, 어머니

은빛강 2012. 3. 11. 16:12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⑮ - 보는 자는 슬프다, 어머니

작성: 양선규 2012년 3월 11일 일요일 오후 12:28 ·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⑮ - 보는 자는 슬프다, 어머니

성탄일을 두고 누구는 예수의 진짜 생일도 아닌데 왜 그리 난리법석이냐고 따진다. 서양물, 양풍(洋風)에 너무 휘둘리는 것이라고 따끔하게 일침도 놓는다. 내게도 그 비슷한 심사가 있었다. 카톨릭에 입문하기 전에는 성모(聖母) 숭배에 의문이 많았다. 삼위(성부, 성자, 성령)에도 들지 않는 분이 존숭의 대상으로 어느 곳에나 입상(立像)으로 모셔져 있는 게 탐탁치 않았다. 입문 초기, 나는 성모상에 절을 하지 않았다. 그냥 엉거주춤하게 그 앞을 지나쳤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배인 개신교의 교리가 그런 엉거주춤한 태도를 조장했다. 로마가 기독교의 중심이 되면서 지중해 연안의 태모(太母) 숭배의식이 녹아든 것이라는 종교사가들의 설명에도 귀가 솔깃했다. 지금은 많이 누그러졌다. 이성적인 생각만으로는 늘 충분하지 않다. 늘 부족하다. 전래(傳來)되는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거기까지 갔다. 가끔씩은, 어머니의 한정 없는 자식 사랑을 숭배하지 않고서 따로 무엇을 또 숭배해야 된단 말인가라는 아주 이단적인(?) 생각까지 들곤 한다. 어제 밤에도 성모상에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하고 왔다. 연말연시가 되자 젊어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아마 출산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성탄일 때문인 것 같다.

시(詩)는 시각이고 산문(散文)은 후각이다. 이유는 없다. 이성적인 추론은 아니다. 그저 내 생각이 그렇다. 시인은 보고 다닌다(見者). 그의 눈은 현미경이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한올한올 주워담는다. 나 같은 소설가는(덜 떨어진?) 어디서든 킁킁거린다. 어디 냄새 구린 데가 없나 하며 코구멍을 벌름거린다. 그의 코는 개코다(犬子?).

보는 이로서의 시인의 자태를 잘 보여주는 시들이 있어 소개한다. 황지우와 문태준의 시다. 둘 다 넙치, 가재미를 소재로 한 ‘어물전’ 시다. 보는 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본다는 것 이외에는 공통점이 없다. 두 어류가 비슷하게 생긴 것만큼만 비슷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종인 것만큼 전혀 다른 시다. 보는 대상도 서로 다르다. 두 시인의 시각과 대비되는 소설가의 후각, 개코에 대해서는, 남의 것을 들 수 없어, 졸작 『적두병』의 한 부분을 들어서 나중에 첨가한다.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황지우)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무궁)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향수로 아내와 심하게 다퉜다. ‘다투다’라는 표현을 쓰지만 사실은 일방적으로 아내에게 화를 내며 폭언을 퍼부었다는 편이 옳았다. 누구한테 선물 받았다는 건데 냄새가 역해서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을 공연히 딸아이에게 주어서 사단이 나게 했다. 재미로 집안 구석구석 여기저기 뿌리고 다닌 딸아이는 그 냄새로 역정을 내는 아버지가 보기 싫어서 일찍 새벽차로 올라갔다. 아내는 내가 예민하다고 타박을 한다. 특히 이런저런 냄새를 두고 투정을 하는 내가 미워 죽겠다는 투다. 빨랫감에 들어가는 세제류에도 곧잘 시비를 건다. 장(醬)류를 다룰 때는 아예 미리 신고를 한다. 아마 집안 내력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어머니에게서 내림으로 물려받은 것 같다. 어머니는 그림도 잘 그렸지만 냄새로 무엇이든 분간을 잘 해내었다. 음식이 타거나 상한 것, 우리 몸의 땀 냄새 같은 것들을 예민하게 집어내곤 했다. 어머니가 만든 음식은 우선 그 냄새부터가 좋았다. 그 생각을 하니 지금도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코끝을 맴돈다. 그런 어머니가 나에게 자신의 모습을 감춘 것은 당신이 세상을 버리기 대여섯 달 전쯤부터였다. 앓아누운 방 안으로 나를 들이지 않았다. 몰골도 몰골이지만 냄새가 안 좋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거였다. 그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통 기억에 없다. 그게 한 번씩 슬프다. 어머니의 그림을 내가 몇 장이나 가지고 있는지가 궁금할 때가 있어서 한 번 세어 본 적도 있다. 열두어 장?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림들조차 세월에 색이 바래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달성공원 앞을 지나다니던 그림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이 내 얼굴을 가끔씩 스쳤던 것 같았고, 한번은 집세가 밀렸으니 집주인이 하던 가게를 우회해서 가자는 말씀을 했던 것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래도 5원짜리 산도(샌드) 과자 하나는 입에 물었던 것 같다. 너댓 살이나 되었을까? 왜 그 그림이 가장 선명한 축에 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어머니 생각이 나면 으레 그 대목부터 리바이벌 된다. 어쨌든 나는 어머니의 말년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 앞에서 말한 어머니의 냄새 통금령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어머니가 어떻게 육신의 몰락을 이루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림의 연결이 자주 끊어지는 지도 모르겠다. 임종 시 볼 수 있었던 그 뼈만 남은 앙상한 육신은 이미 어머니가 아니었다. 모든 윤곽이 지워진 채, 오직 움푹 파인 눈자위와 볼썽사납게 튀어나온 입언저리로만 남아있는, 그야말로 해골과 진배없는 얼굴과 간헐적으로 들락거리는 미약한 숨결만 가지고는 도저히 어머니라고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내가 할 말을 이미 다 해 버린 로렌 아이슬리의 말처럼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그저 ‘생이 지나가면서 늘 남기는 부스러기’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다.

불가(佛家)에서는 천상에서의 대화가 말이 아니라 향내로 이루어진다고 한다는 걸 누구에겐가 들었던 기억이 난다. 냄새에 그렇게 민감했던 어머니도 아마 천상의 대화를 추억하느라 그랬을 것이다. 불현듯 로렌의 독백이 생각났다. 그래요, 엄마.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졸작, 『적두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