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인문학 스프-소설[장졸우교(藏拙于巧)⑥ - 허무와의 대적, 유자 약전(劉子略傳)

은빛강 2012. 4. 17. 00:58

인문학 스프-소설
장졸우교(藏拙于巧)⑥ - 허무와의 대적, 유자 약전(劉子略傳)

“조용필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인생을 아무렇게나, 막 살고 싶다는 충동이 엄습해요. 왜 그런지 모르겠다니깐...”
컴퓨터가 전공인 동료가 언젠가 내 차를 같이 타고 가던 중에 그렇게 말했다. 본인도 조용필을 꽤나 좋아하는 편인데, 내 차에서 처음 듣는 노래들이 있다고, 신기하다고 말한 다음에 그런 말을 꺼냈다. <무정유정>, <바람과 갈대>, <눈물로 보이는 그대> 같은 노래였지 싶다. 그런 노래는 노래방에도 편재되어 있지 않아 우정 찾아서 듣지 않으면 잘 들을 수 없었다. 아마 개중에는 원곡 가수가 따로 있는 노래도 있지 싶다. 언젠가 조용필의 노래를 후배 가수들이 작심하고 부르는 TV 프로가 있었다.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제... 스타일에 맞게 이리저리 편곡을 해서 나름 열창을 했다. 그걸 보면서 생각했다. 조용필만한 가수가 잘 없구나. 그 역시 50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예술가였다(진정한 예술가들은 500년에 걸쳐 사는 이다). 젊어서 그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의 음색(音色)의 비루(鄙陋)함을 탓하고 우정 그의 노래를 얕잡아 본 적이 잠시 있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타고난 ‘하나 살아남는 음색’임을 깨닫고 그의 노래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타고난 자는 시속(時俗)을 타고 넘는다. 그래야 ‘하나 살아남는’ 예술가가 된다. 그렇게 설명을 하고, ‘막 살고 싶은 충동’에 대해서도 한 마디 했다. 그런 게 바로 예술의 효용이라고.
인간이 허무(虛無)에 대적하는 방법 중, 취하는 것 중, 그래도 좀 건전한 것이 예술이다. 술이니 마약이니 도박이니, 온갖 세상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용케 버틴 세월의 끝자락에서, 마지막 남은 사랑도 가고, 다시 못 올 혁명도 가고, 이것저것 다 떠나고 나면, 남는 것은 종교와 예술이다. 구원의 약속은 언제나 향기롭고 달콤하지만, 평생을 불경(不敬)과 신성모독으로 살아온 자의 죄 값을 한꺼번에 다 물어내려면, 종교는 아무래도 체모(體貌)가 좀 상한다. 모든 걸 아낌없이 다 받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마나다. 그런 상태라면 세속이나 종교나 오십보백보다. 그게 돌아온 탕자들에게는 좀 거북할 수가 있다. 때론 비위에 안 맞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예술이다. 손쉬운 것은 아니지만, 인간으로 죽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나에게도 예술이 ‘막 살고 싶다는 충동’을 억세게 권했던 적이 있었다. 대학 3학년에서 4학년 올라갈 무렵이었지 싶다. 2학기 들어 우리와 합류한 제대 복학생 선배가 뜬금없이 이제하의 「유자약전」이라는 소설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했다. 공부가 많이 될 거라고 했다. 경남 밀양(수산)이 고향인(그는 발령도 부산으로 받았다), 사람 좋았던, 시 공부를 하던 선배였다. 그 전에도 한 번, 그는 내게 ‘공부가 될 만한’ 책을 권했던 적이 있었다. 김현의 『상상력과 인간』을 권했다.
“정말 글 잘 쓴다 아이가? 본문 중에 나오는 시들은 와 그리 다 좋노. 혼자 읽을 때와는 영 달라.”
나는 그 책을 빌려보고 난 뒤 따로 『소설과 사회』라는 김현의 책을 사서 탐독했다. 그때부터 웬지 시보다는 소설 쪽으로 더 관심이 갔다. 그 선배의 말은 과연 사실이었다. 작품을 읽는 장엄한 시범들이 책 속에서 속출했다. 좋은 공부가 되었다. 그런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유자약전」도 냉큼 읽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유자약전」은 좀 달랐다. 뭐랄까, 고등학교 2학년 때 조숙한 친구를 따라 방석집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 소설을 읽고 나서 생각지도 못했던 아노미를 겪어야 했다. 그야말로, 세상을 ‘막 살고 싶은 충동’이 물밀 듯 쳐들어왔던 것이다. 커튼 하나만 젖히면 바로 저쪽에, 오직 쾌락원칙만이 지배하는, 달콤하기만 한, 그야말로 한 세상 떠메고 갈, 예술가의 인생이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가 당장 그쪽에서 이리 오라고, 나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그 소설을 읽어내려 가는 동안은 몹시 힘이 쓰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소설 읽는 재미와는 별개로 좀 괴로웠다. 아직 어리고 미숙했던 내 상상력은 그 소설이 요구하는 ‘삶의 비극적인 요소들에 대한 포괄적인 추인(追認)’에 대해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세상은 내게 살만한 곳이었다. 예술이라면 그것을 야멸차게 그려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그 작품의 텍스트 무의식에 대해서도 반발심이 솟구쳤다. 내게는 아직 해피 엔딩이 유효했다. 그것을 비웃는 작가의 미소에는 기꺼이 승복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곳이 만약 예술의 세계라면, 내 두 발을 다 들여놓기가 두려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자약전」은 마치, 기초 없이 처음 대면하는 어려운 ‘수학’ 문제처럼, 내게는 꽤나 어려운 난제(難題)였다. 도대체 너는 예술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정면에서 다그치고 있었다. 명색이 소설가가 되고나서도, 나이 사십이 되고나서도, 그 물음에 답하는 수준이 고작 다음과 같았던 나였으니 언감생심, 세상 모르던 스무살의 문청 수준에서는, 「유자약전」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도발이었다. 예술이 추구해야 할 ‘묘사의 의무’에 대해서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던 시절이었던 지라 「유자약전」은 차라리 고문이었다.

태평소에 대해선 좀 알고 계신가?”
이런 걸 두고 점입가경이라고 했던가, 태평소야 농악에 쓰는 악기가 아닌가, 농악인들 내가 알 리가 없었다.
“노군(老君)이야 음악에 조예가 깊으시니까... 나야 뭐 아는 게 있나?”
꼭 <뭘 아시는가>를 가지고 말문을 여는 그의 행투가 성가시기도 했고 얄밉기도 했다. 자기야 전공도 문학이겠다, 한때 글께나 썼던 처지니 이것저것 관심이 많았겠지만 이쪽의 처지는 그렇지가 못했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자기 기준에서, 잡스러운 것들을 무슨 교양의 척도나 되는 것처럼 치부하는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럼, 처용무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으시겠구만?”
노군(老君)도 내 마음을 읽었나 보다. 실소를 머금으며 이번에는 처용무를 들고 나왔다. 나로서는 맥이 닿지 않는 말들을 늘어놓는 걸 보니 또 노군(老君)식의 무슨 체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또 우면산 아니면 우배산이겠지, 나는 좀 냉소적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보나마나 또 우면산 아니면 우배산 같은 것 아뇨? ”
“결국은 그 길로 통하겠지...”
노군(老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재즈도 태평소도 처용무도 별것 아닌 셈이었다. 기껏해야 노군(老君)식 유토피아 지향성 정도가 해석의 척도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궁금증이 일었다. 재즈야 잘 모르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태평소와 처용무가 그것과 어떻게 나란히 설 수 있다는 것인가?
“재즈와 태평소에는 다같이 죽음을 안고 넘어서려는 어떤 몸부림 같은 것이 있지요. 일견 쾌활한 곡조인 것 같지만, 체념, 달관, 비장(悲壯), 냉소, 허무 같은 것들이 그 속에 녹아 들어가 있지요. 그러면서도 그것들을 묶어내는 건 충만한 에로스라는 느낌이 들어요. 아이러니 그 자체예요. 아주 질긴 어떤 끈이 그것들을 칭칭 감고 있지요. 그건 큰 위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체념과 달관이라...재즈가 흑인 음악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었다. 태평소는 어떨까, 그 높낮이가 뚜렷한,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간절함 같은 것이 그런 해석을 가능케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죽음을 안고 넘어서려는 몸부림’을 그것들에서 읽어낸다는 것은 좀 과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이를테면 노군(老君)식 확대해석일 수도 있었다. 이미 우면산의 경우에서도 그는 자기식대로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았던가?(노군은 우면산이 서울에 있는 산이라는 걸 모르고, 광주 가는 길가에 있는, 제법 우쭐한 산에다 제 멋대로 그 이름을 붙여 놓았었다. 그 이름은 무슨 <동방불패>라나, 시덥잖은 홍콩 영화에 나오는 우배산을 본떠 붙였다고 했다.)
“예술이란 게 뭐 별건가? 깊이 들어가면 결국은 한 가지 길로 가는 거 아뇨? 삶과 죽음...유한한 삶과 영원한 아름다움... 그런 거야 일반적인 문제고...”
구태여 이것저것 견강부회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노군(老君)이 바로 반응을 보였다.
“그런 차원은 아니고... 나도 재즈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들은 이야긴데, 뉴올리언즈에서는요, 거기가 재즈의 발상지라고 알려져 있는데, 흑인 남자가 죽으면 브라스 밴드가 고용되어서 장례행렬을 선도한답니다. 물론 장송곡을 연주하지요. 관이 묻히고 여기저기서 애도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늙은 목사의 기도가 시작되고, 작은 북 주자는 드럼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가족들의 눈물을 한 사람씩 닦아줍니다. 그리고 묘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재즈를, <Oh,Didn't He Ramble>을 이 브라스 밴드가 연주하지요. 쾌활하게요... 그건 태도의 문제이지요.”
태도의 문제라...그 말 속에 무언가 아이러니가 숨어있는 듯했다. 그가 말한 ‘차원’이라는 것도 이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테면, 죽음에 직접 닿아있는 것과 멀리 우회하고 있는 것과는 차별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재즈와 태평소는 죽음에 직접 닿아있는 양식이다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처용무는 무엇인가? 노군(老君)의 설명이 기다려졌다.
“그건 그렇다 치고, 처용무는 왜 재즈와 연결된다는 거지요? 처용무도 죽음에 직접 닿아있다는 겁니까?”
“죽음에 닿아있다... 그 표현이 마음에 드는군요. 우리가 흔히 처용무를 남성적이라고들 하지요. 장중하고, 힘이 있고...그런데, 그 속에서 죽음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더군요. 아내를 역신(疫神)에게 빼앗긴 처용이 춤을 추어서 역신의 굴복을 받아내었다는 것이 처용가의 내용인데, 춤까지도 에로티시즘의 차원에서만 읽는다는 건 지나친 문자주의(文字主義)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신은 에로스의 표상일진대 그것을 넘어서는 처용의 춤이 타나토스를, 일종의 절대자유를 내포하고 있으리라는 가정은 왜 하지 못하는 걸까요? ”
절대자유를 지향하는 죽음에의 충동이 삶에의 충동을 제압한다? 요설 같기도 하고, 무언가 속 알맹이가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논리를 떠나서, 노군(老君)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처용무의 동작들이 마치 죽음과 삶의 경계를 구획 짓는 몸짓인 것 같기도 하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노군(老君)식 사고에 전염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전염된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균형감각 아니겠는가. 노군(老君)에게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가급적이면 객관이 존중되는 세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노군(老君)은 가끔씩 나의 객관을 흔들려고 시도한다. 내가 느끼기에는 그의 그러한 시도는 아주 집요하다. 내가 묵묵부답이자 노군(老君)이 계속 말을 이었다.
“재즈를 통해서요... 백인들은 흑인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지요. 물론 그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요... ‘니그로 르네상스’라고 하던 그 시절에 흑인 특유의 리듬 감각을 가장 좋아하고 흥겨워했던 계층이 백인 상류 사회였다는 거예요. 그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처용무에서도 마찬가지 의문으로 남지요. 재즈의 기본 비트가 8비트랍니다. 이 8박 리듬이라는 것은 원래 백인의 댄스 감각에는 없었던 거죠. 19세기 유럽의 부드럽고 유연한 댄스 스텝이 원래 백인 고유의 리듬 감각이었죠. 처용무가 바로 이 8박 리듬이에요. 재미있지 않아요? 1마디의 8분할이라는 건 흔한 리듬이 아니거든요? 3박자에 익숙한 사람이 이 처용무를 배우려면 힘이 많이 든답니다. 중간에 없던 용수철을 하나 더 넣어야 된다고 하더군요. 처용무 역시 궁중음악으로 전수가 되지요.” (졸고 「설검」 중에서)

예술은 묘사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학이든, 궁극적인 예술의 표현 수단은 묘사다. 설명이나 주장은 예술의 적통이 아니다. 예술이 무엇과 사통(私通)하든, 그 결과는 늘 묘사를 억압하는 것일 뿐이다. 묘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을 그릴 뿐 다른 무엇의 사주를 받아 있는 것 이상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고정관념이든 선입견이든 이념이든 이해(利害)든, 세상이 요구하는 편파(偏頗)에 대항해서 자기를 지키는 것이 묘사다. 그래서 묘사에는 늘 ‘긴장과 대치’가 요구된다. 한 일간지에 실린 이제하 선생의 「유자약전」 자작 해설도 내겐 그렇게 이해되었다.
“긴장하고 대치하지 않으면 이 세계는 파악이 되지 않는다. 가령 희멀건 캔버스를 앞에 놓고 서구인들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그 공백을 메울 것이냐는 문제를 제기하고 대치하면서 이 세계를 파악한다. 동양에서는 무엇으로 생각을 줄이고 어떻게 그걸 비울 것이냐는 명제로 그 긴장관계를 대신한다. 둘 다 결국은 같은 소리다. 시에서 말하는 ‘깨어 있는 시’ ‘자유를 행사하는 시’라는 소리도 그 뜻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긴장과 대치에서 이루어지는 조화와 화해는 이상일 뿐이지 실제로 세상에서 실천되는 법이란 없다.
‘유자약전’은 그런 절망에서 출발하면서 씌어진 소설이다. 간단한 남녀관계를 설정하고 그들이 어느 정도나 서로 긴장하고 대치할 수 있느냐를 따지고 그래서 ‘자아’라는 자신들 영역 밖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얼마나 확장해갈 수 있을 것인가…. 돌이켜 보면 소설이 씌어진 몇몇 동기 중에서도 가장 중심부분에 이 모티브가 놓여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1960년대 말의 그 암울한 사회적 현실과 분위기가 한 몫 거들었을지 모른다.” (이제하, 「내 소설속의 사랑」, 경향신문)

얼마 전에 한 잡지에서 가수 장사익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그의 인생 역정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다. 그가 25년 동안 14번의 직장을 옮겨 다니다가 어느날 문득 세상살이의 헛됨에 눈을 떴다. 그런 게 돈오(頓悟)지 싶다. 그래서 안착한 곳이 바로 예술, 음악이었다. 그 직전 3년간은 친척이 운영하는 카센터에서 조수로 일했다고 하니 가히 입전수수(入廛垂手)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음악에서 그 숱한 중생들이 얻은 열락(悅樂)들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치사가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가 처음 예술 세계로 들어온 문이 태평소였다. 태평소를 배워 그 악기 연주자로 활약하다가 비로소 가객으로 전향, 득음의 경지를 얻어 현재에 이르고 있단다. 그런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이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생업에 몰두하다가 한 순간 예술로 전향했다. 박완서 선생의 40세보다 물경 5년이나 더 늦었다. 그러고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고흐나 고갱도 그랬다. 그런 것이 바로 예술의 세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업을 빈 깡통처럼 걷어찰 수 있어야 ‘경이의 문’이 열린다. 문꼬리만 붙들고 문지방만 밟고 서 있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게 예술이다. 또 있었다. 하필 왜 태평소였을까? 그가 그 악기로 예술의 문을 두드린 것이 내게는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았다. 앞의 「설검」 인용에서도 잠깐 나왔지만, 나이 사십에 나도 그 악기에 까닭없이 동(動)했었다. 물론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지금 내게는 없다.
이제하 선생의 「유자약전」이 나를 소설가로 입문케 한 결정적인 동인 중의 하나라는 것은 확실하다. 쾌락에 절어 살면서도 남들의 질시에서 벗어나는 일은 예술가가 되는 길밖에 없다고, 나는 「유자약전」을 보고 굳게 결심했다. 그 한 가지 결심으로 남몰래 칼을 갈았다. 내가 소설가로 입신한 뒤에 그 사실을 안 선후배 동기들이 모두 놀랐다. 그들은 나 같은 룸팬(정치적 인간?)이 소설을 쓰고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고 했다. 한 선배는 “복병이 아니라 복장교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당시 내가 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것을 빗대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길로 들어서고도 나는 종내 지지부진하였다. 룸팬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여태 「유자약전」 같은 소설은 단 한 편도 써보지 못했다. 쾌락원칙이 현실원칙을 압도하는 인생도 전혀 살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정반대로만 살아온 느낌이다. 생각해 보면 아쉬운 점이 많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 팔자 소관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유자약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다. 근처에 가 보지도 못한 자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문을 열어준 은사에 감사의 염만 가지고 있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 나머지 소감은 공적 해설로 대신한다.

예술가의 눈으로 타락한 세계 비판 : 남유자라는 여성의 짧은 생애를 그린 중편 ‘유자약전(劉子略傳)’은 1969년 ‘현대문학’에 처음 발표되고 73년 ‘초식’이라는 소설집에 묶였다. 81년 고려원의 ‘한국대표작가 중편소설 100선’ 17권으로 재출간됐으나 현재 절판상태이며 문학동네에서 출간중인 ‘이제하 전집’에 수록될 예정이다. 환상적 리얼리즘 수법을 구사하는 이 작품은 당시 문학수준에 비춰볼 때 놀라울 만큼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예술가 소설이자 이제하의 대표작이다.
화가인 ‘나’의 화실에 고교동창 N의 소개로 그의 사촌여동생 유자가 찾아온다. 위암에 걸린 27세의 여성화가인 유자는 이틀 사흘씩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멍청한 모습이 되어 며칠씩 의자위에 까부라지는 기이한 잠버릇을 갖고 있다. 유자는 화가임에도 그림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창호지에다 손가락으로 푸른 계열의 물감을 풀어서 형태를 만든 뒤 곧 없애버리는 묘한 화법이다. ‘나’는 시샘과 두려움으로 유자의 빛나는 예술적 성취를 바라본다.
들판에 한마리 사슴이나 암사자나 뿔 돋은 장끼 한마리가 땅을 파고 죽어갈 때 십리 사방에서 온갖 종류의 짐승들이 그것을 보려고 몰려들 듯 죽어가는 유자의 주변에 온갖 인간 군상이 출현하고 마침내 유자가 숨을 거둔다. 예술가로서의 유자는 훼손된 세계를 막아내는 유일한 거점인 동시에 현실의 몰이해로 인해 무참히 죽어가는 순교자이다. 〈한윤정기자〉 (작성자 뿌리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