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장졸우교(藏拙于巧)⑦ - 예술과 구원, 달과 6펜스

은빛강 2012. 4. 17. 01:00

인문학 스프-소설
장졸우교(藏拙于巧)⑦ - 예술과 구원, 달과 6펜스

누구나 어려움에 처하면 스스로를 과장하거나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려움에 처하는 일’이다. 그 탓이지 싶다. 늙으면 노여움이 많아지고(나를 무시하는 자들이 갑자기 많아진다), 물질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고(믿을 건 돈밖에 없다!), 감투 욕심이 나서 밤잠을 설친다(선거란 선거에는 죄다 기웃거린다). 늙으면 일찍 죽어야 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건지도 모르겠다(오늘도 아내와 함께 장 보러 갔다가 비슷한 또래의 장사치에게서 ‘어르신’ 소리를 듣고 기분을 잡쳤다).
어렵다 싶으면 보통 밖에서 불멸(不滅)하는 어떤 것을 찾아서 그것이 마치 내 것인 양 위안을 삼는다. 그것은 오래된 인류의 습성이다. 따지고 보...면, 문학이나 예술의 가치도 궁극적으로는 그런 위안의 효용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젊어서는 추구할 쾌가 많아서 또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면 불멸(不滅) 이외의 삶의 목표를 두기가 어렵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혹은 인간답게 죽기 위해, 밖에서든 안에서든, 불멸하는 그 무엇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 살아보면 누구나 알 일이겠지만 어쩔 수 없이 부실(不實)한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 부실함에 매달려(6펜스?) 아등바등 사느니 저 멀리 있는 달(예술?)에다 내 거처를 옮겨두는 편이 보다 인간다운 일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 같다.

서머싯 몸의 「레드(Red, 돌아온 연인)」가 생각난다. 30여 년 전, 대학 1학년 때 교양 영어 시간에 강독으로 공부했던 소설이다. 그 소설과 함께 옆자리의, 유난히 뺨이 붉던 소녀도 생각이 난다(그러니까 그녀도 ‘레드’였던 셈이다). 그 소녀와 함께 학교 앞 서점에서 「레드(Red, 돌아온 연인)」 해적판 번역본을 사서 같이 본 것도 기억이 난다. 그녀와의 기억 중에는 좀 나이브한 것이 있다. 하루는 영어 수업 시간 중에 그 소녀와 번역본과 교수님의 해석이 상충하는 부분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리 머리 위로 후드드득 책이 통째로 날아들었다. 갑자기 강의실 안이 꽁꽁 얼어붙었다. 강독 중이시던 교수님이 우리쪽으로 자기 책을 냅다 집어던진 것이다. 40대 초반의 여자 선생님이셨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우리를 째려보고 계셨다(그때는 교수님도 ‘레드’였다). 말씀인즉슨,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학생회장이 수업 시간 중에 여학생하고 딱 달라붙어서 꼴사납게 웬 연애질이냐는 거였다(그때는 교양과정부 학생회라는 게 있었고 내가 학생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 소녀와 나는 전혀 그런 감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상황 자체가 좀 생뚱맞았다. 그래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 때문에 또 야단을 맞았다. 태도가 불량하다고 했다. 유독 나한테만 과민하게 반응하시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 한 학기 내내 그 선생님과는 불편하게 지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는데, 그 선생님 부군이 내가 가입해 있었던 동문 서클의 지도교수님이셨다. 앙앙불락(怏怏不樂), 그 지도교수님도 참 대단한 분이셨는데 부창부수(夫唱婦隨), 사모님도 꽤나 까칠하셨다. 어쨌든 영어 선생님은 사전에 이쪽의 정보를 좀 가지고 계셨던 터라 기대에 가까운 약간의 선입견을 가지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기대에 부응하기는커녕 천방지축, 매일같이 여학생하고 키득거리고 앉았으니 밉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모진 꾸지람을 들어도 쌌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상황이 좀 재미있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괜히 나 때문에 희생양이 된 그 소녀에게 꽤나 미안했었는데 오히려 그 소녀는 ‘그게 뭐 어떻냐’는 식으로 더 당당했었던 것 같다. 그 일로 둘 사이가 좀 돈독해졌던 것 같았는데 학기가 끝나고 같이 수업들을 일이 없어지는 바람에 더 이상의 관계(?) 진척은 없었다. 그렇게 까칠하시던 선생님도 지금은 팔순에 접어드셨을 것 같은데 잘 계시나 모르겠다(그때 서클 지도교수님은 그 얼마 후 지금 직장의 총장으로 봉직하셨다. 재직 시절 교수들 공부시키는 것으로 악명(?)을 떨치셨다고 한다).

어쨌든 그 ‘사건’ 때문에 「레드(Red, 돌아온 연인)」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대학 초년 시절의 ‘원초적 장면’이 되고 말았다. 물론 그 소녀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몇 년 전에 누군가에게서 그때 그 이야기를 그 소녀(이제는 할머니다)가 하는 것을 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집들이 행사였는지, 계모임이었는지, 몇 집 모인 자리였다는 것 같았는데, 그 이야기를 전하는 분이 꽤나 재미지다는 표정을 잔뜩 지으며 내게 그 이야기를 전했다. 까닭 없이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때는 내가 ‘레드’였다). 내겐 영원히 재미없는(그 무렵 긴급조치 9호(맞나?)가 떨어지고 학도호국단이라는 게 생겨서 나의 황금 시절도 끝났다), 그때 그 이야기를 제대로 전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내 이야기도 그렇겠지만, 인간의 기억은 절대 믿을 것이 못된다. 「레드(Red, 돌아온 연인)」도 그렇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 그 이야기를 푸른 수염(Blue Beard) 이야기와 섞어서 기억한다. 기억은 언제나 오해와 편견, 그리고 현재의 감성을 통로로 삼는다. 왜 붉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이는지 알 수 없다. ‘신부를 잡아먹는 괴물 신랑’의 푸른 이미지가 늘 ‘레드’와 겹쳐 떠오른다. 30년 뒤, ‘레드’가 배불뚝이 대머리에, 뺨에 붉은 핏줄 자국이 선명한, 난봉꾼처럼 생긴 술꾼 선장으로 나타난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또 있는 걸까? 이를테면 ‘신부를 잡아먹는 괴물 신랑’과도 같은 자의식이 무의식의 파편 같은 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깊숙하게 침전되어 있다는 말인가? 어쨌든 그 때는 그의 변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포경선에 의해 납치된 지 30년이 흐른 뒤였고, 누구나 타락할 수는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레드’, 그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 어두운 색의 푸른 눈, 길고 검은 눈썹을 가진, 아폴로 상을 닮아 모든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 꽃미남 청년이 그렇게 추한 모습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건 반전(反轉)이 아니었다. 다만 억지였다. 그렇게 뜨겁게 사랑했던 샐리(Sally)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차라리 코미디였다. 모든 것이 변해도 눈빛은 변하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그녀를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삼십년을 기다려 온 사람을 몰라볼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샐리는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남편이자 이 소설의 화자인 닐슨(Neilson)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레드를 만나고, 그를 알게 된 닐슨은 그의 모습에 실망해 지금 샐리와 어떻게 하면 헤어질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있다. 마치 샐리가 아니라, 그녀가 그렇게 못 잊어 하던 레드와 30년 동안 사랑을 했었다는 투였다. 레드가 어떻게 변했든 그게 자기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시간이 모든 것을 앗아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남기고 가는 것도 있고 이것저것 실어다 주는 것도 있다. 남긴 것인지 실어다 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 모두를 알 것 같다. 서머싯 몸도, 레드도, 샐리도, 닐슨도, 모두 다 내 안에 있는 것 같다. 3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일렬종대, 한 줄로 서서 모두 내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그러나 있다는 것만 알 뿐, 그들이 어떻게 입장권을 구해 내 안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달리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한 가지, 내가 늙고 추해졌다는 자각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꼭 늙은 레드여서만은 아닌 것 같다. 서머싯 몸도 그랬을 것이다. 그가 늙은 레드, 돌아온 연인이었기 때문에 「레드(Red, 돌아온 연인)」를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자기 일이 아니더라도 자기 일처럼 알 수 있는 유추와 직관의 힘이 있다. 그래서일 것 같다. ‘불멸’에의 동경, 그런 것들이 우리 인간들을 하나로 묶어내고 있는 것 같다. 「레드(Red, 돌아온 연인)」의 출연진들은 모두 ‘불멸하는 그 무엇’에 사로잡힌 영혼들이다. 딱히 사랑이라고, 사랑이라는 관념이라고 꼬집어서 말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 같다. 그들은 무엇인가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원했다. 레드가 돌아온 것도 그 이유에서고, 말없이 오랜 세월 기다린 사람들도 그 이유에서다. 물론 서머싯 몸이나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으면 「레드(Red, 돌아온 연인)」도, 이런 글도, 쓰고 있을 이유도 없다. 서머싯 몸은 인간의 그런 부분에 대한 묘사에 특별히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작가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다. 그 당시의 한 풍습이기도 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형의 권유로(형은 늘 나를 과대평가했다) 그의 자전적 회상록인 『서밍 업 The Summing Up』 영문판을 무턱대고 몇 줄 읽었던 기억도 다시 떠오른다. 내용은 물론 거진 다 탈색되고 없다. 그가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는 것, 그런 그의 신세가 내게는 부담스러웠다는 것, 그가 자기 주변의 사건을 설명하고 사물을 관찰하고 인간들의 삶을 전달하는 것이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무게였다는 것 정도만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다만, 느낌상으로, 그때도 서머싯 몸은 그런 불멸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서머싯 몸의 대표작은 『달과 6펜스』다. 이 소설의 성공으로 그는 인정받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을 계기로 묻혀있던 자전적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도 재평가되면서 그는 작가로서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이 소설은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생애에서 소재를 얻어서 쓴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찰스 스트릭랜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서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그의 위대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런던의 증권회사 사원인 스트릭랜드라는 한 중년남자가 갑자기 가족을 버리고 파리에 가서 화가가 되고, 다시 타히티 섬으로 건너가 토인 여자 아타와 동거하면서 대작을 남기고 문둥병으로 죽기까지의 생애를 그리고 있다. 인간이 삶의 유한성을 예술을 통해 넘어서고자 하는 치열한 의지, 혹은 예술에 매혹된 한 남자의 도저한 이기주의를 서머싯 몸 특유의 절제된 문체로 냉정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제목의 '달'은 예술에 대한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광적인 열의를 나타내고 '6펜스'는 그가 과감히 던져버린 세속적인 그 무엇을 상징한다.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어떻게 ‘불멸’을 추구하는지를 요약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하나를 소개한다.

런던에서 가지고 온, 얼마 안 되는 돈이 다 떨어졌을 때도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중략)그러는 동안에도 그가 그림 그리기를 한 번도 중단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화실에 나가는 일엔 금방 싫증을 내서 결국에는 전적으로 혼자서 그렸다. 캔버스와 물감을 사지 못할 만큼 궁해 본 적은 없었고, 사실은 그 밖의 것은 별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데 퍽 애를 먹었던 것 같다. 워낙 남의 도움을 받기 싫어하는 성미라, 앞선 세대들이 이미 하나씩 하나씩 발견해놓은 기법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죄다 혼자 힘으로 발견해 내느라고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무엇인가를 목표삼고 있긴 했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고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 같다는 인상을 이번에는 더 강하게 받았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림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은 자기 그림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꿈속에서 살고 있었고, 현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오직 마음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붙잡으려는 일념에 다른 것은 다 잊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격렬한 개성을 캔버스에 쏟아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림 그리기를 마치면, 아니, 그리기를 마친다기보다 – 그림을 완성시키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으니까 – 자신을 불태운 열정을 소진시키고 나면, 그것에 관해서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환상에 비하면 일의 결과는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작품을 전람회에 출품해 보시지 않습니까?” 내가 물었다. “남들의 생각을 듣고 싶어 하실 줄 알았는데요.”
“당신은 그렇소?”
그가 이 두 마디 말에 담았던 그 측량할 수 없는 경멸감을 나는 지금도 다 표현할 길이 없다.
“명성을 바라지 않나요? 명성이야말로 대개의 예술가들이 무관심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어린애 같은 짓이지. 전문가라는 치들의 의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데 어찌 속된 무리들의 의견에 신경을 쓴단 말이오?”
“우리가 다 합리적인 존재는 아니지요.” 나는 웃었다.
“명성은 누가 만드오? 비평가, 문인, 주식 중개인, 여자들 아니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당신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미묘하면서도 격렬한 감동을 말예요. 기분이 좋을 것 아니에요? 누구든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고 싶지요. 사람의 혼을 움직여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멜로드라마 같은 소리지.”
“그럼, 왜 그림의 완성도에 신경을 쓰시죠?”
“난 신경 안 써요. 보이는 대로 그리고 싶을 뿐이지.”
“전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무인도에서는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쓴 글을 저밖에는 읽을 사람이 없다는 게 확실하다면 말입니다.”
스트릭랜드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두 눈이 야릇하게 빛났다. 그의 영혼이 마치 뭔가를 보고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나도 때로 생각해 보았소. 망망대해 한가운데 떠 있는 외로운 섬, 그 절해고도의 아무도 모르는 골짜기로 들어가서 신비로운 나무들에 둘러싸여 조용히 살아볼 수 없을까 하고. 거기에서는 내가 바라던 것을 찾을 수가 있을 것 같거든.”
그가 꼭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적당한 형용사가 떠오르지 않으면 몸짓으로 대신했고, 가다가 말이 막히기도 하였다. 그가 말하고 싶었다고 생각되는 것을 나의 말로 표현해 본 것뿐이다. (서머싯 몸/송무 옮김, 『달과 6펜스』 중에서. 일부 표현 인용자 수정)

글쓰기에 비견하자면 스트릭랜드는 하이퍼그라피아(글쓰기 중독증)임에 틀림없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내면적인 욕구를 겉으로 드러내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 행위가 주는 쾌(快)가 다른 모든 유혹들을 압도하기 때문에 그는 계속적으로 그것만을 추구할 뿐이다. 그것이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이끄는 유일한 통로라는 것을 그 자신도 알고 있다. 그 내용을 대화 장면을 통해 서머싯 몸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어쩌면 그건 서머싯 몸의 생각일는지 모른다. 관계없는 일이다. 모든 예술가들이 만약 그런 동기와 방식으로 예술 작품을 생산해 낸다면, 예술은 일차적으로 예술가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예술을 옹호하는 대중들은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을 위한 술을 빚어낸 뒤 홀연히 떠난 곳에서 고작 버려진 술 찌꺼기나 주워담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작가의 영혼이 담긴, 농밀한 증류주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일종의 사기극에 엑스트러로 참여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모든 예술가들이 다 하이퍼그라피아일 필요가 없는 것이라면? 그래도 만약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것이라면? 하이퍼그라피아는 고작 하나의 미친 증세일 뿐이다. 예술 비슷한 것을 하는 미친놈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