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장졸우교(藏拙于巧)⑤ - 건너가는 자, 줄

은빛강 2012. 4. 17. 01:02

인문학 스프-소설
장졸우교(藏拙于巧)⑤ - 건너가는 자, 줄

대학 1학년 때 차라투스트라를 처음 만났다. 우연히 만났다. 아직은 많이 어리고 미숙한 때였다. 정을 나눌 친구, 사랑을 주고받을 연인, 가르침을 줄 스승이 필요한 때였다. 차라투스트라, 그가 어떤 신분으로 내게 왔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때까지 책에서 무엇을 배운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스승다운 스승도 없었다. 학교에서는 늘 아는 것만 가르치거나 배워도 알 수 없는 것들만 가르쳤다(그런 소회는 졸작 『칼과 그림자』에서 자세히 적었다). 차라투스트라를 만나긴 했지만, 그는 종내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미팅 상대나 되는 것처럼, 아니면 가소로운 어린 사기꾼을 앞에 둔 노련한 장물애...비나 되는 것처럼, 그는 말이 없었다. 아마 전자였을 것 같다. 누구의 소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의 체면 때문에, 의무감 정도에서 그렇게 그냥 마주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혼잣말이 대화일 리는 없다. 그와 나는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그냥 헤어졌다. 그 이후로 그의 소식이 간간이 전해오긴 했었다. 알게 모르게 그저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나타났다. 온다는 말도 없이 그냥 왔다. 세월이 흐르고, 우연히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橋)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

낮은 어조로, 그렇게 알아듣기 쉽게, 그는 말했다. 그래서 나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이야기했다. 윌리엄 포크너가 말한 ‘인간의 승리’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러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제 머리가 허옇게 세어버린 나에게, 옛친구에게. 그러냐고, 갈 길이 아직도 머냐고, 아직도 ‘승리하는 인간’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꼭 그런 건 아니었다. 뒷머리를 긁으며 나는 이청준의 「줄」로 대답했다.

『아버지 저도 이젠 사람들 앞에서 줄을 탔으면 합니다.』
허노인은 그때 얼굴색이 조금 변했으나 온화하게 물었다.
『그래…… 그럼 줄을 탈 때 끝이 가까워 보이느냐?』
『네,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가는 줄이 넓게 보이겠구나…….』
『그 위에서 뛰어 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허노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되겠다!』
운은 까닭을 몰랐으나 더 대꾸하지 못했다. 18세가 되었다. 운은 허노인에게 같은 청을 들였다.
『어때, 줄이 넓어 보이더냐?』
『줄이 보이질 않습니다.』
운은 불안했으나 사실대로 말했다.
『그래, 줄을 타고 있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예.』
『귀도 들리지 않고?』
『예.』
그것도 사실대로 대답했다.
『흠, 아직도 객기가 있어…….』
허노인은 턱으로 줄을 가리켰다. 운은 또 아무 대꾸도 못하고 줄로 올라갔다. 사실 운은 자신이 허노인과 같이 줄을 잘 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허노인이 줄을 타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천정 포장을 걷어 젖히고, 넓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허노인은 흰옷에 조명을 받으며 줄을 건너는 것이었는데, 발을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게 그냥 흘러가듯 조용히 줄을 건너가는 노인의 모습은 유령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냥 땅위에서 하품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청준, 「줄」 ]

이청준이라는 기호(記號)가 없었다면 질곡의 70년대를 어떻게 보냈을까,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저 ‘십리 안이 오리무중(도광의)’이었을 것이다. 길을 가는 인간에게는 어디서든, 그것이 줄 위의 길이든 ‘갑골길(도광의, 「甲骨길」)’이든, 반드시 사표(師表)가 필요하다. 인생 전부를 건 모험의 길이든, 삶의 의미를 찾아 침잠을 꾀하는 내성(內省)의 길이든 혼자서 걷는 길은 늘 위태하다. ‘길 없는 길’일수록 더하다. 남들이 쉬이 가지 않는 길일수록 더하다. 이청준은, 암흑의 시대를 살았던 스무살의 청춘들에게는 하나의 뚜렷한 사표였다. 참을성 있게 죽지 않고 사는 법을 그는 가르쳤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관념이었다. 장엄한 것, 오래 견디는 것, 살아남는 것, 그리고 ‘아버지’였다. 장인이나 예술가로 위장한 아버지의 진면목이었다. 「줄」은 그의 ‘아버지 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줄」의 허노인은 나중에 영화 「서편제」의 유봉이로 다시 우리 곁으로 온다. 그들은 모두 우리 세대의 ‘못난 아버지들’이고, ‘미친 아버지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예(技藝)를 빌미로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죽이고, 당당하게 길을 연다. 관념(장엄한 父性)에 굶주린 아들을 위해서다. 일제를 견디고, 동란(動亂)의 틈새를 헤집고 겨우 살아남은, 비겁하고 소심한 아버지를 가졌던 우리 세대에게는 아버지가 언제나 콤플렉스다. 퇴치되어야 할 내 안의 스핑크스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여, 자, 와서 나를 죽여라. 누가 누구를 죽이든 그건 내 알 바 아니다.’라고 외치는 아버지(『노인과 바다』)에 열광하고, 예술에 대한 집착으로 딸의 눈에 청강수를 붓는, 가진 것 하나 없이 미쳐 버린 아버지 앞에서 속절없이 전율하며 눈물을 흘린다. 허노인이 자신의 삶을 하늘(줄) 위에서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러한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청준 소설의 장인이나 예술가는, 아버지 없이 자란 세대의 진정한 아버지, 그것을 극한에서 보여주는 기표, 그저 이야기로만 떠도는, 텅 빈 시니피앙이면서, 동시에 우리 세대가 꿈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당당하게 운명 앞에 자신을 던지는 아버지, 그 장엄한 대상 이미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청준은 그렇게 스스로 관념이 되기를 자처한 작가였다.
소설가는 누구나,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황금의 말(言)’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을 살아생전에 성취한 작가는 아주 없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에 늘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포크너가 말한 바대로 “인간만이 지닌, 자비와 희생과 명예를 위하여 투쟁할 수 있는 영혼과 정신, 그리고 그것을 실어 나르는 영원히 지칠 줄 모르는 작은 목소리”만을 바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황금의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 이청준을 볼 때, 여전히 ‘아버지’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친하게 지내는 후배 교수가 묻는다. 인문학을 하면서 드물게 베스트셀러도 몇 권 낸 친구다. 앞으로 10년은 뭘 하시면서 지내실 건데요? 무슨 뜻? 되물으니, 10년은 소설가로 10년은 검도사범으로 사셨으니 앞으로 10년은 뭘 할 거냐는 거다. 내가 노는 모습이 그렇게 보였나 보다. 그래서 그냥 ‘앞으로 10년은 작은 가게를 하나 열고 싶다’고 대답했다. 무슨 가게요? 대뜸 되받아 묻길래, 커피도 팔고, 고로케도 튀기고, 수제품 빵도 굽고, 떡복기도 좀 맛있게 지지고,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논술 같은 것도 좀 가르치고, 주부들에게 시도 좀 가르치고, 그러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그냥 나오는 대로 답한 것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TV에서 작가 황석영 선생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들었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황선생님은 어떤 레스토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그냥 기분이 나빠진다는 거였다. 자기가 할 일을 딴 사람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란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웃었지만 나로서는 무슨 이서(裏書)나 받은 기분이었다. 그것으로, 못쓰던 딱지 어음이 당당하게 시중에서 유통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이 들면서 그런 기분을 시시때때로 꽤나 느끼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는 그런 말을 좀 하고 다녀도 누가 흉보는 일이 적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말이 나온 김에 얼마 전에 발표한 「적두병」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구절을 소개한다.

이제 이 글을 그만 쓸 때가 온 것 같다. 나의 적두병(赤豆餠-팥떡)이 적두병(赤豆病-팥에 얽힌 병), 혹은 적두병(赤頭病-어릴 때 생긴 병)이었다는 것이 남김없이 다 드러난 이상 ‘적두병’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중언부언 더 쓸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아쉬운 점 한 가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아버지가 노상(路上)의 적두병 장사로 돈을 모아 공원상회를 차린 것은 당연한 성공이었다. 아버지의 적두병은 공원 앞에서는 호가 난 명품 간식거리였다. 가격도 주변의 다른 풀빵들과는 비할 수 없이 고가(高價)였다. 그 앞에서 돌아서는 가난한 엄마들도 많았고 그런 엄마 앞에서 떼를 쓰며 울던 내 또래의 아이들도 많이 보았다(가출 사건 이후로 나는 리어카에 실려 동반 출퇴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겉과 속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거의 환상적인, 꿈에도 잊지 못할, 아버지의 적두병을 비로소 맛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럴 때면 으레 맛보기로 하나씩 아이들에게 적두병 하나씩을 통으로 거저 주곤 했다. 그것을 받아든 아이들의 그 환한 얼굴들, 어쩌면 그래서 더 장사가 잘 된 것인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주류도매업으로 업종을 바꾸지 않고 지금의 ‘빵쟁이님’처럼 버젓이 ‘적두병’이라는 간판을 달고 달성공원 앞의 명소로 자리잡을 빵가게를 하나 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아마 그 업을 물려받은 나는 지금 그 가게 안에서 느긋한 표정으로 “굽는 데 20분, 식히는 데 10분”이라며 줄서서 보채는 손님들을 달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