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장졸우교(藏拙于巧)①

은빛강 2012. 4. 17. 01:06

인문학 스프-소설
장졸우교(藏拙于巧)① - 고래 뱃속, 몰개월의 새

글은 왜 쓰는가? 이 질문은 신화적인 대답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대화와 그 수준이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일종의 존재론적인 질문이다.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물었다. 아침에는 욕을, 낮에는 칭찬을, 밤에는 그 행위들에 대해 반성하는 자가 누구인가? 오이디푸스가 대답했다. 글 쓰는 자다. 오이디푸스의 대답을 듣고 스핑크스가 다시 물었다. 너는 네 운명, 글 쓰는 자의 운명을 감당할 수 있느냐? 오이디푸스가 답했다. 물론이다. 누구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그러자, 스핑크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핑크스는 신탁(神託)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오이디푸스는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모두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대화다. 글쓰기가 한 인간의 존재론이 되는 것은 그처럼 무의식의 차원에서이다. 그것의 동기를 현실적인 차원에서 찾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모하고 황당한 일이다. 작가 이청준(1939-2008)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물론 사자 우리로 돌진해 들어간 휴가병 아저씨의 광기나 타이타닉호의 악사들이 무엇 때문에 배가 가라앉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찬송가를 연주하고 있었으며, 그렇게 해야만 했던가를 가슴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중략) 문학을 왜 하는가. 왜 쓰는가. 문학이 왜 있어야 하는가… 그것을 묻는 것은 아마도 그 휴가병 아저씨나 침몰선 악사들에게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게 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당돌스런 질문이 될지도 모른다. 문학하는 일 자체가 어쩌면 바로 그 휴가병 아저씨의 무모하고도 광기어린 돌격, 아니면 타이타닉호 악사들의 마지막 연주와도 같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이청준, 『말없음표의 속말들』 중에서)
‘광기(狂氣)’와 ‘장엄(莊嚴)’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인간의 두 갈래 존재 방식, 작가 이청준은 이 두 가지 상극의 성향과 글쓰기를 연관시킨다. 인간에게는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가 동시에 공존한다는 것, 그 둘을 하나의 형식 안에서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문학, 운명으로서의 글쓰기밖에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게 이해된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피하면서 받아들이고, 모르면서 알았던 것처럼, 작가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군가는 그 일에 나서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작가의 운명을 처음 직감한 것은 스무살의 막막함 속에서였다. 한정 없이 밀려드는 무중력감, 그 막막한 젊음을 달래기 위해 「몰개월의 새」(황석영, 1976)를 읽었다. 대학 2학년 때, 수업시간 중이었다. 소설 속의 글자들과 게릴라전을 벌이던, 간혹 띄엄띄엄 들려오던 노교수의 목소리가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모종의 불안감을 은신처 삼아 붕쑥불쑥 출몰하던 그것들이 한 순간 깨끗하게 섬멸되었다. 마치 소이탄(燒夷彈)이라도 맞은 듯, 그들이 암약하던 내 귓가의 소란이 일순 정적으로 채워졌다. 윙 하는 소리가 지상의 모든 소리를 차단했다. 몇 초나 지났을까, 다시 소리들이 땅굴에서 나오는 게릴라들처럼 한둘 그 모습을 보이면서 무엇인가 빠른 속도로 내 머리를 가로질러 지나쳤다. 그 횡단(橫斷)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오리무중이다. 다만 그것이 지나가고 난 다음 내 머릿속은 전에 없이 평온해졌다. 어떤 무겁고 딱딱한 것 하나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와 저 먼 곳 어디로, ‘태평양’ 쯤이나 되는 먼 곳으로, 날아간 느낌도 들었던 것 같다. 아, 그랬던 거구나, 나지막히 나는 그렇게 내뱉었다.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여자들이 무엇인가를 차 속으로 계속해서 던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무수하게 날아왔다. 몰개월 가로는 금방 지나갔다. 군가소리는 여전했다. 나는 승선해서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보았다. 플라스틱으로 조잡하게 만든 오뚜기 한쌍이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어렸던 모양이라, 나는 그것을 남지나해 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나는 그 대목을 읽고 또 읽고 있었다. ‘몰개월’, 그 생소한 이름의 ‘고래 뱃속’을 그렇게 접했다.

추장과 내가 가까워진 것은 야간전투 훈련장에서였다. 우리는 2인용 텐트를 같이 썼다. 추장은 맨손으로 입을 달래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음식이든지 말만 나오면 입으로 요리를 했다. 언제나 배가 고픈 우리는 그의 얘기에 빨려들어 거의 환장할 지경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영계백숙으로 포식을 했다. 그것도 사흘이나. 추장은 십여 리나 되는 양계장에서 여섯 마리의 닭을 생포해 와서는 구두끈으로 닭발을 묶어 우의로 덮어두었다. 우리는 한밤중에 일어나 철모에 닭을 튀겨 먹고 독도법 훈련이며 매복훈련에 나갔다. 야간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우리는 추장이 구해 놓은 보급품을 먹었다. 무, 수박, 고구마……. 추장은 늘 전우의 영양상태를 걱정했다.
“한잔 빨러 가자.”
추장이 판초우의를 입고 나를 깨웠다. 그가 우의를 들추자 새 군화가 세 켤레나 대롱거리고 있었다. 사단 보급창을 거덜냈는가? 통신대원들의 새로 받은 군화를 훔친 것이다. 우리는 당당히 연병장을 구보했다. 버젓하게 뛰어가야 탈이 없다는 그의 주장이었다. 철조망을 무사히 통과한 우리는 귀가 멍멍할 정도로 개구리 소리를 들었다.
바다를 뒤편에 둔 몰개월은 특교대가 생기자 주막이 하나씩 생기면서 슬레트 지붕에 블록으로 지은 바라크들이 이십여 채 생겨났다.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인지 한 년도 내다보지 않았다. 그 때 길옆에 허엽스레 한 것이 보였다. 시궁창에 하반신을 담그고 엎드린 여자, 그렇게 미자를 만났다. 미자는 억병으로 마신 것 같았다. 몸은 형편없이 마르고 키는 멀쑥했다. 슈미즈만 입은 여자를 빗속에 버려 둘 수 없었다. 그보다 나는 시궁창에 쳐 박힌 여자의 그런 모양에 욕정을 일으켰다.
우리는 송장을 치우듯 미자를 들었다. 갈매기 집을 찾아갔을 때 주인여자는 넋두리를 폈다. 이 년들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줘야지. 이 쓸개 빠진 년들이 애인한테 편지질을 하는데 어떤 년들은 열, 스물에게 쓴다우. 미자년이나 애란이나 가끔 술 쳐먹구 지랄들을 하는데 아마 상대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는 모양이지. 제대하구 한 번도 들여다보는 놈 없는데. 나는 미자를 아랫목에 누이고 이불을 덮어줬다. 우리가 술을 먹는 동안 이따금 이불을 들치고 건너다 봤지만 모른 척했다. 추장이 빠끔이라고 별명을 붙일 정도로 미자는 마른 얼굴에 눈만 컸다.
가상 늪 지역을 허우적거리며 훈련을 받았다. 진흙탕 물에 전신을 담그고 총을 받쳐들고 건너다 포복을 하다 늪 지역을 지나 다시 부비트랩이 밀집한 곳을 지났다. 함정이 있고 인계철선이 질러있고 죽창이 있기도 한다. 당한 병사는 모두 전사자가 되어 기합을 받는 그 훈련에서 나는 폭약을 터뜨렸으므로 전사 분대로 끌려갔다.
그 때 주보병이 뛰어왔다. 면회신청이다. 어이없게도 내 이름이 불렸다. 한복을 입은 여자가 나를 반긴다. 나는 그 여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몰개월이 어쩌구, 똥까이가 어쩌구, 하는 주변의 소리에 미자가 가져 온 김밥과 삶은 고구마를 아귀아귀 먹어댔다.
미자는 내 뒷주머니에 담배도 넣어 주었다. 밤에 오라는 그녀의 말대로 나는 담치기를 했다. 미자는 상사와 앉아 있다가 뺨을 맞고 있었다. 갈매기집을 나서고 말았다. 쫓아 나온 미자는 코피가 터져 있다. 나는 논가에 데리고 가 얼굴을 씻어 주었다.
“초가 다 타면 자요.”
나는 은근히 조바심이 나서 미자를 건드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몸에 도통 기별이 가지 않았다.
“내다봐요. 고깃배가 보일 거야. 갈매기들이 많이 울지요?”
나는 미자를 먹지 못 했다. 낯을 씻길 때부터 먹지 못하게 무관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귀대하는 길에 미자에게 들렀다. 미자는 내가 밥을 먹는 동안 시중을 들었다.
“모레 떠난다.”
“집에 갔었다면서요? 좋은 사람 있어요?”
“있었는데 시집갔더라야.”
“내일 밤에 나와요. 전부 몰려나올 거야. 꼭…… 한코 주께.” (황석영, 『몰개월의 새』 )

세상에는 어디 하나 하찮은 것이라고는 없는 법인데 젊어서는 그걸 잘 모른다. 작가들은 그게 안쓰럽다. 그래서 황석영은 「몰개월의 새」라는 소설을 썼고, 나는 지금 그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황석영이 쓴 소설의 주인공이,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전장에서, 방금 같이 담배를 나누어 피우던 전우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걸 보면서, 유치하게 여겼던 술집 작부(미자)의 이별 선물(오뚜기 인형)을 바다(남지나해)에 던져버린 것을 못내 후회했던 것처럼, 나 역시 젊어서 생각 없이 버린 것들을 생각하며 후회한다. 미로(迷路) 속에서의 그 젊은 날들을 일말의 주저도 없이 망각의 바다에 그냥 던져버렸던 것을 후회한다. 내게 청춘은 그저 불우하고 불운한 것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들이 없었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졌겠는가, 그것을 돌아다보면서 내가 할 일은 아마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로렌 아이슬리가 자서전에서 말했듯이 ‘비명을 지르며 외면하는 일과, 그것 옆에 조용히 누워 보는 일’일 것이다. 만약 그 옆에 누웠다면, 그것에서 비릿한 어머니의 젖냄새가 나는 것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젊은 날은 정하(政夏)라는 친구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여왕과 나(Queen and I)’를 소개한 것도 정하였다. ‘여왕’은 시내 한 가운데 있던 고전 음악 다방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글 쓰는 자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이를테면 그곳은 내게 ‘스핑크스’와 같은 존재였다(그곳에서의 생활은 졸작 「황금연못」에서 소개했다). 3년여의 세월, 그곳에서의 청춘을 뒤로하고 정하는 먼저 군대를 갔다. 하던 대학원 공부도 그만 두고 입대를 해서는 전방 어딘가에 떨어져서 남들이 해보기 어려운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나중에 보니 『실미도』 영화에 나오는 부대와 비슷한 곳에서 기간병 임무를 맡았었다. 다른 친구들도 정하를 따라 입대한 뒤, 나는 혼자 남아 대학원을 졸업했다. 사관학교 교관 시험을 봐서 합격한 뒤, 광주로 갔다. 장교 임관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

광주에서의 16주는 철부지 문청에게, 「몰개월의 새」를 읽으며 처음 느꼈던, 관념적이고 막연했던 어떤 ‘고래 뱃속’을 몸으로 각인시켜주었다. 어른이 되려면 먼저 고아가 되어야 한다, 부모 아래서는 결코 어른이 될 수 없다. 거기서 나는 그 말을 수도 없이 되내었다. 물론 실존의 부모를 뜻하는 건 아니었다. 사회적 고아의식이라고나 할까, 완전한 고립감, 나를 둘러싼 모든 보호막과의 작별,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광주에서의 16주를 아무런 시간 감각도 없이 보내면서 나는 그 고아의식과의 싸움에 오로지 전심전력했다. 가늘게나마 모태와 연결되던 탯줄이 완전히 끊어진 느낌, 어디 하나 기대거나 어리광을 부릴 대상이 전무하다는 느낌, 용서받고 죄사함 받을 고해대마저 사라진 느낌, 최종적으로 조회해 볼 수 있는 마지막 율법마저 사라진 느낌, 그래서 이 세상에 홀로 던져져 있다는 느낌, 그런 것들로 인해 삭막해 진 재빛 하늘 아래서 천애의 고아가 되어 있다는 느낌, 그런 ‘느낌들’ 속에서 헤매었다. 이미 그런 ‘느낌’은 광주 땅을 처음 밟으면서부터 찾아오기 시작했다.

누누이 말하는 거지만, 광주에서의 4개월은 태초의 어느 한 시점, 혹은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의 한 가운데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로렌 아이슬리가 자서전 『그 모든 낯선 시간들』에서, 자신의 출신지인 네브래스카 주 서부 제3 황무지에서의 삶을 “우리는 이집트가 나일 강 진흙 평지에서 처음 일어날 때 이미 있었던 그 시간 없는 고독 속에서 살았다”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광주에서의 내 삶 역시 ‘시간 없는 고독 속’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광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도시의 고독은 독(毒)이 되어 내 육신을 이곳저곳 마비시켰다. 그 중에서도 사고력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매사에 흥미를 잃고, 관심이 없었다. 땅마저 ‘사각형의 기억’을 잃고 흐물거렸다. 그러니, 그 어떤 것도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벌점은 쌓이고 구대장들과의 갈등도 깊어갔다. 처음에는 금연의 부작용, 금단 증세 때문인가도 싶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것은 5.18이었다. 그 땅을 밟고서야 나는 비로소 5.18 광주항쟁을 알았다. 처음 밟은 그 땅은 사개(상자 따위의 모퉁이를 끼워 맞추기 위하여 서로 맞물리는 끝을 들쭉날쭉하게 파낸 부분)가 너무 정연했다. 모든 것이 단정했다. 그럴수록 침묵과 고요가 너무 낯설었다. 그러나, 과장된 평온이 어쩔 수 없이 흘려내는 어떤 원(怨)과 한(恨)을 알아채기에는 그때까지의 내가 너무 통속적이었다.
입대를 하루 앞두고 광주를 찾은 나는 저녁을 먹고 남는 시간을 음악다방에서 보냈다. 혼자서 마지막 담배를 피우며(입영과 함께 금연이었다) ‘은화 1불의 여왕’을 주문했다. ‘여왕과 나’에 두고 온 한 여자를 생각했다. 그녀도 ‘미자’처럼, 출정을 앞둔 남자 친구에게 선물을 주었다. ‘모라도’라는 상표를 가진 모직 스웨터였다. 그녀의 얼굴을 그리고, 멀리 떨어진 대구에서 왔다는 것, 입대를 하루 앞두고 있다는 것, 고향에 두고 온 여자 친구를 생각하며 신청한다는 내용을 적어 보냈다. 남자 DJ는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냥 또박또박 자기 사정만 전했다.
“광주에는 ‘은화 1불의 여왕’이 없답니다. 대신 ‘킬링 미 소프틀리’를 보내드립니다.”
그러면서도 DJ는 ‘은화 1불의 여왕’이라는 노래가 어떤 것인지 짤막하게나마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아무런 동정도 공감도 없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조금 엉뚱하다 싶었다(그러나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두 노래의 메시지가 어떻게 접속되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가사는 물론이고, 필링이나 톤이 전혀 다른 노래였다. 약간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광주는 그저 다른 모든 타향 중의 하나였다. 광주가 다른 땅과는 영원히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4주간의 기본군사훈련이 끝나고 외출이 허용되어 광주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었던 때였다. 대구에서 같이 입대한 친구와 함께 금남로의 한 목욕탕을 찾았다. 그때 무슨 대화를 나눈지는 자세한 기억이 없다. 다만 오랜만에 사제(私製) 목욕탕에 들어가는 기분에 경상도 기분으로(사투리가 좀 시끄럽다) 크게 소리를 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탕 속으로 막 들어가면서였을 것이다. 갑자기 목욕탕 안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사람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물 끼얹던 소리도 물바가지 굴러다니던 소리도 일순 모두 사라졌다. 한 순간에, 모든 음향과 화면이 정지되고 말았다. 그런 느낌이었다. 그 정지 화면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은 오직 우리 둘의 시선뿐이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숨 막히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아무 말 없이도, 어떤 식으로든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분명히 알았다. 그건 분명한 살기(殺氣)였고, 원(怨)이었고 또 한(恨)이었다. 그와 나는 서둘러 ‘걸레조각 같은 적막으로’(「꿈이 없는 빈집에는」) 몸을 닦아내고 목욕탕을 나왔다.
귀대해서 한 동기생에게서 ‘광주의 진실’에 대해서 들었다. 우리가 그렇게 활보하던 거리에서 그토록 참혹한 살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왜 ‘킬링 미 소프틀리’였는지, 왜 가끔씩 군사학 교관들이 뜻 모르게 실어증을 노출시켰는지,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킬링 필드, 고해(告解), 죄 많은 내 청춘, 그 순간 내게는 문득 그런 단어들이 떠올랐다. 광주에서의 무력감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글쓰기 공부에 나서면서도 나는 그 단어들을 내 연습장에서 종내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2년 뒤, 어렵게 작가가 된 수상 소감 말미에 “문학은 나의 종교다”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