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인감언이설(甘言利說)⑪문학 스프 - 時俗

은빛강 2012. 4. 17. 01:07

인감언이설(甘言利說)⑪문학 스프 - 時俗
 - 키르케의 마법

키르케의 마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마녀는 인간을 돼지로 바꿉니다. 마법에 걸린 자들에게는, 몸은 돼지지만 정신은 아직 인간의 것이기에, 고통이 뒤따릅니다. 분열은 항상 고통을 수반합니다. 분열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하루라도 빨리 잊어야 합니다. 마법은 그것을 강요합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잊는 것보다 더 강력한 마법이 없기에 마녀 키르케는 그렇게 인간을 길들입니다. 키르케와 인간의 싸움은 기억의 고통과 망각의 즐거움 사이, 그 분열의 틈새에서 출발합니다. 그녀의 마법에 대항하는 인간의 의지는 분열(나는 내가 아니다), 인지(나는 마법에 걸려 있다), 극복(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이라는 세 가지 갈등의 계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직 ‘기억’만이 인간을 돼지에서 다시 인간으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동일성의 고통을 ‘망각의 즐거움’으로 무마(무화)하지 않고 구제와 해방의 순간을 위해 끝까지 기억을 유지하려는 의지는 감당하기 어려운 내적분열을 수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현실의 마법에 대항해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신화적 영웅들의 ‘귀향의 서사’로 읽힙니다. 돌아갈 존재의 집은 기억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현실은 항상 망각의 방식으로 자신을 용인하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은 유혹입니다. 현실은 자신의 제물이 순순히 그에게 발생한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의 새로운 현실로 인정하며 그 현실에 맞는 새로운 언어를 얻기 위해 망각의 시학을 개발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리하여 마법임을 부정(몰각)하고 현실 자신을 유혹하도록 강요합니다. 현실을 유혹하기, 그것이 그의 희망이 되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답게 살기’는 그 유혹을 거부합니다. 현실은 ‘마녀(魔女)’이고, 마녀를 유혹하면서 일생을 망각의 즐거움 속에서 지내는 것은 돼지의 삶입니다. 지금까지의 글 내용은, ‘키르케의 마법’을 원용하여 ‘후기 산업사회의 시적 대응’을 ‘망각의 시학’과 ‘기억의 시학’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경계하는 한 글(도정일, ‘망각의 시학, 기억의 시학’,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에서 원용(援用)한 것입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작금의 잘못된 지역색, 잘못된 지역감정, 잘못된 안보관, 잘못된 정치의식을 빗대어 말하기 위해 빌려온 것입니다.
‘키르케의 마법’ 말고도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도착적 현상이 또 있습니다. 소위 지역감정과 연관된 ‘피해자 증후군’의 남발(?) 현상입니다.

‘나는 과거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지금 이럴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너는 나를 이해하고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어야 해.’
이런 심리를 ‘피해자 증후군’이라고 한다. 왜 현대의 많은 사람이 피해자 증후군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말이 있다. 어느 개그 프로그램에서 유행하던 말.
“욕망에 충실해!”
예전에는 욕망이란 단어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낯이 붉어지곤 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로 들어서면서 욕망은 더 이상 숨기거나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서 충족시켜야 할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게다가 욕망을 드러내놓고 추구하는 사람이 오히려 솔직하고 능력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변화는 점점 더 심해지는 심리학 이론의 무분별한 적용과 확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요즘 들어 소설과 에세이들이 심리학 이론을 피상적으로 차용,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면서 심리 치료에 대한 오해가 많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감정의 자유로운 표현이 정신 건강에 필수적이다’라는 믿음이다. ‘화가 날 때는 화를 내라’, ‘절대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마라’ 등의 지침들이 이런저런 심리서에 등장하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지극히 건강한 것처럼 설파되고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이드(id)가 있던 곳에 자아(ego)를’이란 말은 본능적 욕구나 감정을 자신에게 숨기지 말라는 뜻이지 그것을 모두 밖으로 표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만일 우리가 내부의 욕망이나 감정을 거르지 않고 그대로 다 표현하면 모두 끔찍한 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난 이럴 수밖에 없어”라고 말하며 “너는 내가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어야 해”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김혜남)]

‘피해자 증후군’은 보통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그 배경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상처 받은 과거가 사람마다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당당’합니다. 비뚤어진 보상의식이 그렇게 나타납니다. 자신의 악행을 상대방에게 죄의식 없이 강요합니다. 그 당당함 속에는 때로는 특권의식까지 자리잡습니다. 누구나 피해자라는 생각에 빠지면 자신을 매우 특별한 존재라고 인식하게 된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너희 따위가 이런 고통을 알아?’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과대 포장해서 상대방의 고통에 대한 몰각을 합리화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스러운 상황을 연출하면서 그것을 견디는 것을 오히려 낙으로 삼는 경우까지 생깁니다. 그야말로 도착(倒錯)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피해자 증후군’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당면한 문제입니다. 후기 산업화 시대의 인간 소외 현상이 그런 식으로 도착적 인격을 조장해 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피해자 증후군’의 일반적인 속성이 한 지역의 불특정 다수에게 하나의 ‘집단 심리현상’으로 고착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위장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거철을 맞이해서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위의 인용문에 등장하는 것처럼, “난 이럴 수밖에 없어. 너는 내가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어야 해. 나는 과거에 너희들에게 받은 상처가 있어.”라는 일종의 폭력적 사고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상처를 주면서도 도리어 상처를 입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불안(트라우마)을 엉뚱한 대상에게 투사합니다. 그런 심리와 행동이 집단화되면서 모두 ‘당당’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도착적인 ‘특권의식’까지 동반한 그 도착적 심리상태의 노예를 자청하고 있습니다. 큰일입니다. 다시 망국병으로 도지는 것도 시간문제라 생각됩니다.

‘키르케의 마법’과 ‘피해자 증후군’의 유혹에 저항하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입니다. 분열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인간이었던 기억’을 끝까지 고수하는 길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