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장졸우교(藏拙于巧)③

은빛강 2012. 4. 17. 01:04

인문학 스프-소설
장졸우교(藏拙于巧)③ - 어머니, 옛우물

오른 쪽 두부(頭部) 상단의 통증이 며칠 째 그대로다. 두피 바로 아래서, 간헐적으로, 견디기 힘든 통증이 쇄도한다. 한 번 닥치면 내 머리는 순간 소름끼치는 정전(停電) 사태를 겪는다. 두어 번 연속으로 때릴 때도 있다. 그럴 땐 정말 죽을 맛이다. 짜증이 밀려오면서 온몸이 무력화된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당신도 머리 아플 때가 있어요?” 속 모르는 아내가 약을 올린다. 아마 이것저것 떠올리기 싫었던 기억들을 반추하느라 남모르게 불면의 밤을 며칠 보낸 것이 사단인 것 같다. 독거(獨居) 노인을 자처하던 형이 과하게 술을 마시고 아파트 계단에서 굴렀다는 소식을 듣고, 불 속에 던져 넣었던 것들을 다시 불러내는 과정에서 모종의 저항, 스파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럴 때면, 제발 그냥 나를 좀 내버려두라고 외치고 싶으면서도, 이율배반적으로 그 고통을 전파해서 남과 고루 나누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친다. 통제가 안 된다. 용심(用心)일 것이다. 그러면 고통이 감쪽같이 사라질 것이라는 착각마저 든다. 그러나 막상 발설해 놓고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어쩔 수 없이 안다. 그 전파된 고통은 떠도는 원귀(寃鬼)마냥 떠돌 뿐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안 좋은 기분으로 며칠을 보내며 잠시 내 안을 들여다보자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부터 했다. 그레이터 마더(great mother). 위대한 어머니. 무의식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강한 집착. 그러니까, 프로이트 식으로는 모성콤플렉스다. 그 콤플렉스를 융 심리학에서는 그레이트 마더와 아들 연인(son-lover)이라는 말로 서사화한다. 분절된 개념이 아니라 연속적인 행위의 서사로 설명한다. 그 해석학적 코드를 사용해서 황순원 소설의 육질(肉質)들을 에로티즘으로 일사불란(一絲不亂), 포정(庖丁)이나 되는 양 날래게 발라내면서 덩달아 나도 시원스럽게 해체(解體)되는 듯한 느낌을 얻었던 적이 있었다. 세탁기로 치면, 세탁, 탈수, 건조까지 완벽하게 그 안에서 해결되는 듯했다. 모든 것이 ‘위대한 어머니와 아들-연인 사이의 불륜’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소나기」의 순진무구한 첫사랑도 결국은 작가의 모성 콤플렉스가 만든 인형극에 불과한 것이었다. 누구나 자기 안에 있는 것부터 밖에서 보는 것이다. 그것만 크게 눈에 들어논다. 황순원 소설을 읽으며 다시 확인한 것이었지만, 어머니 그림이 내게 너무 장엄하게(혹은 지나치게 동정적으로) 그려져 있다는 건 오매불망(寤寐不忘),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 논문 안에서, 알게 모르게 암약(暗躍)하던 나의 오이디푸스도 완연하게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보름 만에 황순원 소설이 완전히 다 해체된 것은 결국 내 안의 오이디푸스 덕분이었다. 그가 황순원 소설 속의 오이디푸스와 나눈 대화의 결과가 결국 내 논문이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자는 누구인가? 내 안의 스핑크스가 물었다. 내 안의 오이디푸스가 답했다. 나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니, 그것은 사실 별것도 아니다. 인간은, 항상 어떤 ‘장엄한 존재’를 쫓는다. 작가도 예외는 아니다. 인생에 대한 과장된 느낌이라는 것은 누구든 글을 쓰는 존재인 한 반드시 감수해야 하는 천형이다. 그 모든 것에서 어머니는 선수(先受) 과목이다. 모든 아들들에게는 어머니가 당연한 ‘장엄한 존재’다. 그건 어머니도 원하는 거다. 서로 원하는 거다. 그래서 그건 수수께끼가 아니다. 내 안의 스핑크스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악을 쓰며 대들었다. 그럴까? 스핑크스가 피식 나를 비웃었다. 그러면서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오정희 소설 「옛우물」의 한 대목을 불러내었다.

그 여름, 나를 찾아온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허둥대는 어미의 기색을 본능적으로 느낀 아이는 필사적으로 젖꼭지를 물고 놓지 않았다. 진저리를 치며 물어뜯었다. 이가 돋기 시작한 아이의 무는 힘은 무서웠다. 아앗,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아이의 뺨을 후려쳤다. 불에 덴 듯 울어대는 아이를 떼어놓자 젖꼭지 잘려 나간 듯한 아픔과 함께 피가 흘러내렸다. 아이의 입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브래지어 속에 거즈를 넣어 흐르는 피를 막으며 나는 절박한 불안에 우는 아이를 이웃집에 맡기고 그에게 달려갔다. 그와 함께 강을 건너 깊은 계곡을 타고 오래된 절을 찾아갔다.
여름 한낮, 천 년의 세월로 퇴락한 절 마당에는 영산홍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영산홍 붉은 빛은 지옥까지 가닿는다고, 꽃빛에 눈부셔하며 그가 말했다. 지옥까지 가겠노라고, 빛과 소리와 어둠의 끝까지 가보겠노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중략>
나는 더러운 간이화장실에서 오줌을 누고 브래지어 속을 열어 보았다. 피와 젖이 엉겨 달라붙은 거즈를 들추자 날카롭게 박힌 두 개의 잇자국이 선명했다. 나는 돌연 메스꺼움을 느끼며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하였다.(「옛우물」, 오정희, 『저녁의 게임 외』)

굳이 ‘내 안의 스핑크스’ 때문은 아니었다. 제주도는 내게 늘 밀린 숙제와 같았다. 제대로 한 번 답사하겠다고 마음먹은 지가 꽤 오래되었지만 여태 우왕좌왕 시도도 못하고 있다. 철들고, 제주도에는 세 번 다녀왔다. 30대에 한 번, 40대에 한 번, 50대에 한 번이다. 그것도 거의 공무, 아니면 단체 여행이었다. 생각해 보니 제주도행뿐이 아니었다. 여행에는 아주 인색했다.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지금까지 통틀어서 열 번이 안 된다. 차를 몰고부터는 장기적인 기차나 버스 여행 자체를 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어디를 다녀와도 1박(혹은 무박) 2일이 고작이었다. 30대 후반부터 공연히 이런 저런 일에 몸을 꽁꽁 매달아 놓았다. 그런 생활 패턴이 지금의 여행혐오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처음에는 운동을 통해 어떤 ‘변화’를 만들어보려고 애를 썼다. 한 눈 팔지 않고 매진했다. 그 후로는 그 프로그램의 운영자가 되어서 또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당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의 출구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카프카의 말처럼, 그때는 자유가 아니라 오직 하나의 출구만을 찾던 시절이었다. 자유나 해방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만큼 급박한 느낌으로 쫓겨 지내던 때였다. 이제 그것이 관성이 되었다. 그런 출구 찾기에서도 어느 정도의 해방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드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내게 제주도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에서의 기억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몇 살 때 뭍으로 나왔는지도 잘 모른다. 짐작으로 서너 살 때일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 동안의 제주도 여행에서도 출생지를 찾아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문득 그냥 그렇게 둘 수 없다는 염이 든 것이다. 어떤 그림이든 내 그림으로 한 장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내 탯줄을 묻어둔 곳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 같았다. 공무 출장 중 하루를 비워 김녕을 찾았던 것은 바로 그런 까닭에서였다.
“갯바위 위에서 빨갛게 익은 얼굴로 하염없이 울고 있더구나. 목소리가 아주 잠겼던 것을 보면 한참을 그러고 있었던 것 같더라.”
형에게 업혀 놀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늦게까지 귀가하지 않는 형과 나를 찾으러 갯가에 나왔다가 본 풍경을 어머니는 그렇게 전했다. 어머니가 들려준 바닷가에서의 그림은 고작 그 정도가 전부다. 그 이야기의 현장으로 갔다. 백사장이 유난히 희었다. 아마 조개껍질이 잘게 부서져서 만들어진 것인 모양이었다. 백사장을 한 바퀴 돌아서 봉화대를 끼고 마을로 들어갔다. 해녀 생활에서 은퇴하고 아들 집에서 살고 있다는 한 할머니를 만났다. 이곳저곳 사진기를 들이대는 이쪽을 보고 먼저 말을 건넸다. 고향이냐고 물었다. 여기서 태어났다고 대답했다. 6.25 때 이야기를 물었다. 자기가 열 서너 살 때 일이란다. 자기 집에서도 솥이랑 이불이랑을 피난민들에게 갖다 주었다고 했다. 내가 태어날 때 산파 역할을 했다는 할머니 이야기를 물었다. 그 할머니일 것으로 짐작되는 분의 아들이 얼마 전 세상을 떴다고 했다. 자손들은 다 대처에 나가 산다고 했다. 주소를 찾아가지고 가지 못해서 태어난 집을 찾는 일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어머니는 해녀 수업도 잠시 받았다고 했다. 결국은 숨이 차서 해 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게 다다. 무언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나 더 있다. 뱀 이야기다. 방 안에 나를 눕히고 부엌일을 보고 다시 들어오니 머리맡에 왠 긴 막대가 하나 놓여 있더란다. 얘가 언제 나가서 이 막대를 주워왔나 하고 가까이 가보니 빛깔도 좋은 청동 빛 구렁이어서 기겁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주인집 할머니가 와서 쌀알을 뿌리며 달래서 내보냈다고 한다. 초행길, 제주도행은 그렇게 사진 몇 장으로 일단 갈무리하기로 했다.
형은 이미 한차례 순행을 끝낸 모양이었다. 제주도를 시작으로 서울로 대전으로 대구로 한 바퀴 크게 돌았다고 했다. 여기저기 잠시잠시 머물었던 곳도 일일이 다 체크를 하였고, 우리 집 근처에도 올라와서도 연락 없이 이곳저곳 훑고 다닌 눈치였다. 형수 이야기로는 첫사랑이었던 여고생의 옛날 집 앞까지 순례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마음에 있는 일과 드러내고 하는 일이 엄연히 구별이 있는데 도대체가 그러니 아무리 환갑 나이라도 부부싸움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느냐고 눈을 흘겼다. 좀 웃기지 않느냐는 거였다. 내가 봐도 주책이었다. 형수는 아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하자마자 연수원 뒷바라지를 핑계로 아예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형에게는 나보다 훨씬 많은 그림이 있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에 대한 그림도 월등히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런 글쓰기를 할 때면 형의 그림이 탐날 때가 많다. 형이 가지고 있는 그림이 수량 면에서만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은 내가 대학을 막 졸업했을 때였다. 형의 요청으로 그때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형의 학창시절 사진들을 정리하면서(형은 군입대를 앞두고 나에게 자신의 소지품들을 위탁했고 그때까지 그것들을 내가 가지고 있었다) 문득 그것을 깨달았다. 형의 사진은 명암이 분명했다. 형의 얼굴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과 돌아가신 후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형에게는 학창 시절 전성기가 있었다. 내가 ‘누구의 동생’이라는 명찰을 뗀 것은 거의 최근의 일이다. 주로 형 친구들이지만, 지금도 간혹 그 명찰로 나를 부르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내 이름이 안중에 없다. 그런 형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긍지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형과 함께 한 사진 속에서의 어머니는 내 그림 속의 어머니와는 많이 달랐다. 어머니의 그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내 앨범 속에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동정은 될지언정, 나는 어머니의 긍지는 아니었다. 형도 마찬가지였다. 형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어떤 사진에서도 웃음을 남기지 않았다. 그 침울한 얼굴은 형의 몰락이 어머니의 죽음과 전혀 무관치는 않을 것이라는 추리를 강요했다.
어머니의 죽음과 형의 몰락이 모종의 친연성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내게는 그닥 유쾌한 것이 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 모든 충만했던 에너지들을 다 방전시키고 쓸쓸히 무대의 뒤편으로 사라진 형과, 그 이후로 길바닥을 훑고 다니던 부랑(浮浪)의 양아치 생활을 청산하고 낮도깨비처럼 학교 공부에 매달리기 시작한 동생의 그 상반된 인생행로가 내겐 단순한 ‘사실’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일종의 아이러니거나 폭력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왜 그런 식으로 갑자기 엉망진창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아이러니, 그 폭력이 어떻게 해서 발생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짚어낼 수가 없었다. 사람 일을 머리로 헤아린다는 것 자체가 못난 짓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사람이 바뀌는가,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 형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지금 와서의 생각이지만, 형은 어머니의 진정한 ‘아들-연인(son lover)’이 아니었던가 싶다. 형은 아버지가 어머니의 몸속에서 다시 그 정수(精髓)만으로 부활한 존재였다. 아버지의 태생적인 문약(文弱)을 극복하고, 총명과 강건함과 사교성으로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활동이면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형은 어머니로서는 자신이 세계에 내 보낸 최고의 작품이었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일개 연민과 동정의 대상에 불과했다. 단지 어머니의 사랑을 비경제적으로 분산시킬 뿐인 부수적인 존재였을 뿐이었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저 어머니 치마폭 안에서만 어정거렸고, 공부든 운동이든 그저 그만그만한 아이였다. 나서는 일도 없었거니와 누구를 따라다니는 일도 없었다. 늘 혼자였던 막내아들, ‘조근놈’(제주도 사투리로 막내 아이)이었다.
“넌 외탁이야, 형하고는 달라.”
어머니가 그런 말로 날 위로하려 했던 것도, 그래서 팥쥐의 그 감미로운 세계로, 모든 것으로부터의 도피가 가능한, 그 안일(安逸)과 자기애의 보호막 안으로, 내가 입장할 수 있도록 안내한 것도 사실은 ‘못난 아들’에 대한 일종의 위로였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을까봐 두려움에 치를 떨던, 그래서 “필사적으로 젖꼭지를 물고 놓지 않았던”, 불쌍한 조근놈이었을 뿐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깨질 듯이 아프던 머리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나는 콩쥐 형의 그늘에서 늘 어머니의 주변만을 맴돌던 팥쥐 동생이었다. 형과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던 동생을 어머니는 ‘외탁’이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나는 그게 어머니의 깜찍한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최근에 와서야 알았다. 언젠가부터 아버지의 얼굴이 거의 그대로 내게 옮겨와 있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은 내게 유전되어 있었다. 내가 아니었다. 형이야말로 진정한 외탁이었다. 그러니까, 이것도 물론 지금 와서 든 생각이지만, 아버지와 형과의 불화는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실존적인 것이었다. 형의 외탁은 어머니의 콤플렉스였다. 형만 업고 오고, 장손인 큰형을 이북에 남기고 온 어머니에게는 형의 성공이, 절실하기만 했던, ‘절반의 만회’였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불쌍한 어머니, 서른에 나를 낳고 마흔에 세상을 버린 어머니. 그 십여년의 세월 동안 어머니와 나는 기억에 남을만한 행복을 공유한 적이 없었다. 잦은 병치레, 잦은 아버지의 실패, 어머니와 나는 오로지 세상의 불행만을 공유했었다. 물론, 형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어머니의 행복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의 팥쥐였다. 살아생전의 팥쥐가 이제 콩쥐 행세를 하고픈 거다. 그래서 제주도를 다시 찾은 거다. 콩쥐 팥쥐 이야기는 좀더 씌어져야 한다. 그런 거다...
두통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왔다. 생각이 아니었다. 분명 환청이었다. “…아가야, 내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살아있었더라면 지금의 나처럼 될 수 없었을 거야. 그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잖니. 아기를 갖고 동시에 이 세계를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 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란다….”(밀란 쿤데라, 「정체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