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인문학 스프-소설[장졸우교(藏拙于巧)⑨ - 부자유친, 금시조]

은빛강 2012. 4. 17. 00:54

인문학 스프-소설
장졸우교(藏拙于巧)⑨ - 부자유친, 금시조

젊을 때의 일이다. 이문열 소설 『레테의 연가』의 모델이 되었던 분(본인 생각이 그렇다)이 내게 불평을 털어놓았던 적이 있다. 모델료를 지급하는 것도 아니고, 꼭 오해 사기 좋을 내용만 갖다 쓴다는 거였다. 왜 남의 사생활을 그런 식으로 도용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물론 당사자의 자체 평가 결과가 그렇다는 것인데, 자기를 좀 아는 이들이 봤을 때는 오해하기 십상이라는 거였다(사실은 누구도 남의 일에 관심 없다). 그래서 옛날부터 작가와는 이웃해서 살지 말라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작가들은 백일천하(百日天下), 자기를 온통 드러내놓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남들의 사소한 일상이나 배경을 끌어다 쓰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적극적 의미에서, 명예훼손만 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이야기 파티에 누구라도 초빙할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는 이들이 작가다.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죽어 한갓 우주의 먼지로 사라질 인생인데, 그렇게 글자 등속으로라도 한 번 붙들어 매어 주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작가들이다. 그래서 작가들의 친인척은 그야말로 ‘파리 목숨’이다. 소설 속의 자기 역할에 대해서 만족하는 ‘작가들의 친인척’이 있다면 그 작가는 3류 작가일 공산이 크다.
각설하고, 한때 소설가 이문열의 작품과 정치적 입장이 좋지 않게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던 때가 있었다. 작가의 사회적 책무를 망각하고 역사의 발전에 대해서 지나치게 냉담한 입장을 견지한다는 거였다. 작가는 흔히 ‘부유(浮游)하는 인텔리겐챠’로 치부된다. 일정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늘 비판적 이성으로 중무장(?)하고, 세파 속의 참호(塹壕)를 따라, 이 계급 저 계급을 숨가쁘게 넘나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보통의 의식 있는 작가라면 다소 강약의 차이는 있더라도, 늘 힘 있는 쪽의 반대편으로, 거의 자동적으로, 움직인다(미끄러진다?), 물론 그때 ‘힘’의 개념은 작가 스스로 정한다. 어쨌든 반골(反骨)로서의 작가는 늘 부유한다. 그것은 작가가 세상을 견디는 힘이기도 하다. 큰 선거를 앞두고, 작가 이문열이 정치권으로부터의 영입 의사를 전해 듣고 “현세에서는 작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한다. 그의 말대로 현세에서는 ‘작가 이문열’ 이상의 작위(爵位)가 없지 싶다. 그 정도의 무게감이라면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권력이 전혀 작가에게 의미 없는 장식품인 것만은 아니다. 돈 안 되는 작품, 보상 없는 고통, 이름뿐인 구원, 허울 좋은 예술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작가도 때로는 세상의 위로를 구한다. 자신이 세상에게 해 주는 것만큼 자신도 위로받기를 원할 때가 있다.
만약, 작가가 명성과 권력(문화적 권력도 포함한다)과 돈을 모두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반골도 없다. 그런데 반골 없이는 작가도 없다. 그래서 모순어법이다. 그것 없이는 누구도 작가라 자칭할 수 없다. 만약 권력과 돈을 가지고도 반골을 참칭(僭稱)한다면 그건 역모다. 쿠테타다. 그는 이미 작가가 아니다. 정치가거나 혁명가다. 어디 작가만 그러한가? 과학자거나 종교가거나 사정은 매 한가지다. 진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권력과 돈을 얻고서도 스스로 반골을 자칭(自稱)하면 동일한 전철을 밟는다. 세상이 그를 그렇게 몰고 간다. 그게 부담스럽거나 싫으면 은둔이나 잠적, 관조나 달관을 택하면 된다. 그것도 싫을 때, 마지막으로 택할 수 있는 것이 친위(親衛)다. 간혹 그런 선택도 있다. 그렇게 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한다.

한 때 작가 이문열은 친위를 택했다는 항간의 오해를 받았다. 심지어는 작품들이 ‘분서(焚書)’의 대상이 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존경하는 고향 선배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을 보는 후배 마음이 꽤나 짠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작가는 원래 세상의 말(찬사와 증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천재가 하는 일에는 본디 원인이 없지만 대중은 반드시 그것을 자신의 이익과 결부짓기 때문에 부박스런 세간의 타박을 면할 수도 없는 법이다. 그로부터 작가 이문열은 지식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나도 살기에 바빠 선생을 직간접적으로 볼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다. 얼마 전 선생의 고향(석보면 두들마을)에서 『음식디미방』과 관련된 군(郡) 행사가 있어서 그곳에 놀러갔다온 친구가 그 자리에서 작가를 친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행차에는 나도 함께 할 뻔했었다. 선생과 인척관계인 한 다리 건너는 친구네도 있어서 대접도 소홀치 않고 재미도 있을 거라며 부부동반으로 같이 가자고 졸랐었다. 나는 가고 싶었는데 안식구 행사가 겹쳐서 가지 못했다. 친구로부터 오랜만에 선생의 근황을 접하니 객기가 발동했다.
“나 안다고 하고 책 한 권 달라고 하지?”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친구가 순간 생뚱맞다는 표정을 지었다. ‘니가 뭔데?’라는 표정이었다.
“내가 작가잖냐, 오늘의 작가, 그것도 작가 이문열의 직계 후배.”
그러자, 친구가 ‘아, 그랬었지’라는 투로 얼굴을 풀었다. 친구들은 내가 작가라는 걸 알려고 하지 않는다.
“책 달라고 해도 잘 주지는 않을 거야, 나도 한 권 받은 게 없으니까.” 그러고 말았다.

이문열 선생과는 다섯 번 만났다. 출판사에서 한 번, 자택에서 한 번, 문학 세미나에서 강연자와 사회자(패널?)로 한 번, 입시 학원 교무실에서 한 번(조카의 보호자로 선생이 내방했다), 어떤 술자리에서 한 번, 그렇게 다섯 번 만났다. 현재의 기억으로 그렇다. 시간 순서는 지금 좀 헷갈린다. 수 년 동안에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라 잘 정리가 안 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길게 나눈 적은 딱 한 번이다. 30년쯤 전이다. 민음사 사장실에서 초면 인사를 했는데. 그 뒤 집으로 한 번 놀러 오라고 해서 연락을 받고 자택으로 한 번 찾아뵈었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선생의 자택이 있었다. 그때 서너 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사실은 거의 일방적으로 들었다).
작가 이문열을 나는 존경한다. 특별히 존경할 만한 기억에 남을 사적인 은사(恩赦)가 있다거나, 그의 소설에서 까무러칠 만큼의 감동을 받아서가 아니다. 다만, 그가 30년 전 소박하기만 했던 자신의 서재에서 내게 해 준 이야기, 앞으로 쓸 소설이라든지, 전개하고 싶은 사업이라든지, 어떻게 보면 당시로는 황당하기까지 했던, 그 모든 미래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다 실현이 되어 있기에 나는 그를 믿는다. 그가 이룬 것은 당시의 내 상상을 완전히 압도한다. 생각보다 오히려 더 장엄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서 ‘승리’를 본다. 그게 존경의 이유다. 아무 것도 없는 개천 바닥에서 수많은 새우들의 조롱과 멸시를 견디며 스스로 그는 자신이 용(龍)이란느 것을 증명했다. 그날 작가 이문열이 내게 했던 이야기는 글로 정리하면(약간의 주석을 단다면) 책 한 권은 족히 될 분량이다(선생은 다변이고 달변이다). 오늘은 한 마디만 소개한다. 헤어지기 직전에 서로 나눈 말이다. 선생은 독자나 비평가들이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만약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 반드시 세간의 오해를 바로잡을 이문열론을 한 편 써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러마라고 대답했다. 다음 글은 그 약속을 한 지 10여년 뒤에 쓴 두어 편의 이문열론 중에 나오는 말들이다.

정체성 서사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아버지다. 작가가 문제시 하는 그 서사(플롯)의 원(原)주인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부자유친(父子有親), 오륜(五倫)의 앞자리에 들어가 있는 그 말이 왜 힘든 도덕적 실천인지를 깨닫는 일이 정체성 서사가 이루어지는 첫걸음이다. 우리 소설사에서는 이문열만큼 ‘부자유친’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작가가 없다. 이문열 소설의 주된 코드 중의 하나가 ‘의리(義理) 담론’인데(그만큼 삼국지적 의리 서사를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작가도 드물다) 그 발생론적 동기가 ‘의리 없이 월북해 버린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 ‘의리 없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고군분투하는 도덕적 실천이 바로 그의 소설이 지닌 심층적 서사구조다. 그래서 일견 통속성마저 엿보이는 그의 의리담론은 오직 ‘부자유친’의 문제에 한해서만 그 깊이를 드러낸다. 「금시조」나 『시인』에서 보여준 유려한 심리적 통찰은 그 방면에서의 그의 작가적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예가 된다. 그 이외의 문제에서는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것저것, 그저 표나지 않게 『삼국지연의』만, 의리담론만, 반복할 뿐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소설에서는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부자유친’의 문제가 그에게는 불가항력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는 말이다. 그 점은 작가 이문열의 문학적 상상력이 어쩔 수 없이 그로 인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말이면서 동시에, 정련된 관념성으로, 누구도 하지 못했던 바, 그것이 미학(美學)의 경지를 넘볼 수 있는 경지를 개척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힘든 도덕적 실천이 공적(公的) 애비라는 관념성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으로(그것이 지닌 시대착오성의 의미와 함께) 그의 글쓰기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어쩌면 그와 우리의 불운이자 행운이었다. 조금 더 그의 소설에 담겨 있는 ‘관념’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주제론적 층위에서, 동아시아 소설론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다(여기서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말은, 동아시아의 유교적 전통 하에서 형성된 그와 관련된 모든 사회적 코드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서양의 오이디푸스 신화에 비견되는 동아시아의 부자유친 모티프는 서사의 탄생(출발점)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기본적으로 소설은 ‘정체성 서사’를 지향하는데, 아버지의 삶은 나의 삶을 해석하는 기준(플롯)이 된다. 근대소설의 발생은 사적인 아버지와 공적인 아버지(사회적 규범)를 명확히 구분해 플롯을 삼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유태영, 『현대소설론』참조). 자세한 설명을 빌리지 않아도, 제도와 관습, 권력과 소유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그 시초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불화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화의 내용은 주로 지배권(계승권)이나 성적 소유권을 사이에 둔 다툼이지만 그 이외에도 아버지(부성)의 부재나 왜곡에서 비롯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그런 이야기들을 제외하면, 극적 긴장을 선사하는 신화나 설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 시대로 진입하여서도 부자 갈등은 이야기의 주된 소재가 되고 있다. 많이 알려진 것으로 몇 개만 들어 보더라도, 가령 중국 순(舜) 임금의 고사(아버지 고수는 아들 순을 수차례 죽이려 하였음)나 고구려 호동왕자의 죽음과 관련된 설화를 비롯해 조선 시대 영조와 사도세자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과 방랑시인 김삿갓의 행적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의 ‘부자유친’과 유럽의 ‘오이디푸스’는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서사미학을 보여준다. 다음의 인용문은 그 차이가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 서사 문학사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아버지 죽이기와 아버지 찾기가 중첩된 양상으로 드러난다. 서구의 서사 문학들이 살부의식(殺父意識)으로부터 연원하는 아버지 죽이기의 모티프를 강하게 표출하는 반면, 한국 서사 문학들은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필요한 자기 동일시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부정의 양가의식이 아버지 찾기와 죽이기의 모티프로 병치되어 제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현대 성장소설들은 서구 서사문학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아버지와의 극단적 갈등이 서사구조의 핵으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갈등을 넘어선 아버지와의 화해를 모색하는 이중적 서사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최현주, 『한국 현대 성장소설의 세계』참조)

서구의 서사문학은 살부의식이 전경화되어 있고, 우리의 것은 그것에 부자유친이 하나 더 첨가된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정체성 서사의 방향성은 결국 유교적 이념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영역(지역과 문화공동체) 안에서는 모두 동일한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한 부권 부재나 부자 갈등의 서사적 상황을 부자유친의 관점에서 탁월하게 소설적으로 재구성하는 작가가 이문열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 적이 있다. 이문열은 그것을 하나의 소설미학으로 승화시키려는 강한 의욕을 보인다. 그의 소설은 성장소설에 그치는 것을 거부한다. 작가의 정체성 서사가 소설의 전부가 된다는 것을 이문열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문열은 보다 일반화된 소설미학으로 자신의 부자유친 모티프가 편입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부자유친이 단순하게 부자 갈등이나 부권 부재의 상황을 지칭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님을 그의 소설은 강조한다. 그의 소설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자유친의 내포가 무엇인지 그것부터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에서이다.

부자유친이 오륜의 필두를 차지하며 문적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맹자(孟子)』 등문공장구 상(上)에서이다. 맹자는 요임금이 설(楔)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인륜으로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을 가르치도록 했다고 말한 뒤, 공손추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부자유친의 맥(脈)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公孫丑曰 君子之不敎子 何也
공손추가 말하였다. 군자가 (직접) 아들을 가르치지 않음은 어째서입니까?

孟子曰 勢不行也니라 敎子는 必以正이니 以正不行이어든 繼之以怒하고 繼之以怒면 則反夷矣니 夫子敎我以正하시되 夫子도 未出於正也 則是父子相夷也니 父子相夷면 則惡矣니라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세가 행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자는 반드시 올바른 길로써 가르쳐 행해지지 않으면 노함이 뒤따르고 노함이 뒤따르면 도리어 자식의 마음을 상하게 된다. 자식이 생각하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바른 길로써 가르치시지만 아버지도 행실이 바른 길에서 나오지 못하신다고 한다면 이는 부자간에 서로 의를 상하는 것이니, 부자간에 서로 상함은 나쁜 것이다.

古者에 易子而敎之하니라
옛날에는 아들을 서로 바꾸어 가르쳤다.

父子之間은 不責善이니 責善則離하나니 離則不祥이 莫大焉이니라
부자간에는 선으로 책하지 않는 것이니, 선으로 책하면 정이 떨어지게 된다. 정이 떨어지면 불상(나쁨)함이 이보다 더 큼이 없는 것이다.

위의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의 부자유친이 유럽의 오이디푸스 신화와 다른 점은 부자 갈등의 해소 책임이 우선적으로 아버지에게 있다고 강조하는 부분에 있다. 갈등이 아들에게서 발원할 정황이 먼저 가정되지 않는 것은 유교 이념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의 책임이 우선이지만 부자유친은 부자 간 쌍방의 노력이 요구되는 행위 규범이다. 아들이 해야 할 일은 그 뒤를 이어 다음과 같이 적시되고 있다.

孟子曰 事孰爲大오 事親이 爲大하니라 守孰爲大오 守身이 爲大하니라 不失其身而能事其親者를 吾聞之矣요 失其身而能事其親者를 吾未之聞也로라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섬기는 일 중에 무엇이 가장 큼이 되는가? 어버이를 섬김이 큼이 된다. 지키는 일 중에 무엇이 가장 큼이 되는가? 몸(몸의 지조)을 지킴이 큼이 된다. 몸의 지조를 잃지 않고서 그 어버이를 잘 섬긴 자는 내가 들었고, 몸을 잃고서 그 어버이를 잘 섬긴 자는 들어보지 못했다.

孰不爲事리오마는 事親이 事之本也요 孰不爲守리오마는 守身이 守之本也니라
(섬기는 일 중에) 무엇인들 섬김이 되지 않겠는가마는 어버이를 섬김이 섬김의 근본이요, (지키는 일 중에) 무엇인들 지킴이 되지 않겠는가마는 몸을 지킴이 지킴의 근본이다.[『성백효, 『맹자집주』 참조]

오로지 아들은 효(孝)로써 부모를 섬기고(事親), 자신을 지키는 일(守身)에 힘쓸 뿐이니 부자간의 갈등이 아들로부터 비롯될 일이 가정될 수는 애초에 없는 일이었다. 맹자는 무엇보다도 ‘몸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그 연후에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의지, 의도와 관계없이 ‘징벌 받는 아들’이 된다(스핑크스(2) 참조). 결국은 아들에게 책임이 전가되는 서사구조다. 그 점에서 동서양이 갈라선다. 적어도 동중서에 의해 삼강오륜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정립되기 이전의 부자유친에서는 그렇지 않다(부위자강(父爲子綱)은 아비가 아들의 벼리가 된다는 뜻으로, 아들이 아비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배 복종의 서열 개념이 침입되어 있다).

모든 정체성 서사에 아비의 스토리가 플롯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아버지 쪽에서의 친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바로 ‘부자유친 모티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유친의 주체가 아들(가족)을 버리고 떠난 상황에서의 부자유친은 어떻게 실행되어야 하는가? 이문열의 「금시조」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부정의 양가의식, 혹은 아버지 찾기와 죽이기의 병치>를 유려하게, 성공적으로,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성공적인 예술가 소설이면서 동시에 부자유친의 미학적 형상화라는 측면에서도 그 역사적 의의가 인정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다음 부분은 그러한 작가의식이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는 부분이다.

남들이 한두 해면 읽고 지나갈 소학을 몇 년씩이나 거듭 읽도록 버려둔 것하며, 열셋이나 된 그를 소학교 사학년에 집어넣어 굳이 자신의 학문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밀어낸 것도 석담선생의 그런 태도와 연관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 못지않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석담선생에 대한 그 자신의 감정이었다. 스승의 생전 내내, 그는 스승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사모와 그에 못지않은 격렬한 미움으로 뒤얽혀 보내었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그런 그의 감정 역시 어떤 필연적인 논리와는 멀었지만, 그것이 뚜렷이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만은 대강 짐작이 갔다. 열여섯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석담선생의 집안에 남은 후부터 열여덟에 정식으로 입문할 때까지였다. 그동안 그는 학비를 도와주겠다는 당숙 한 분의 호의도 거절하고, 또 나날이 달라지는 세상과 거기에 상응하는 신학문에 대한 동경도 외면한 채, 가망 없는 석담선생의 살림을 꾸려 나갔다. 이미 문인들이 가져오는 쌀섬으로는 부족하게 된 양식은 소작 내준 몇 뙈기 논밭을 스스로 부쳐 충당했고, 한 짐의 땔감을 위해서는 이십 리 삼십 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갸륵하게 여겼지만 실은 그때부터 그의 가슴에는 석담선생을 향한 치열한 애증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문열, 「금시조」)

李文烈 소설(혹은 등장인물)이 이차적 나르시시즘의 화두인 ‘장엄한 대상 이미지’에 특히 집착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금시조」의 주인공, 아비없이 스승에게 위탁된 가짜 아들, 고죽(古竹)에게 석담(石潭)은 유일무이한 ‘장엄한 대상 이미지’였다. 아버지 이상의 아버지였다. 그는 ‘자신의 자아상과 합치되는 전능한 아버지’를 자신의 그 가짜 아버지, 그 환상 속에서 번듯하게 창조해냄으로써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자신의 ‘전능의 세계’를 다시 온전히 구축하려 한다. 그 ‘구체화’ 작업의 시단이 바로, 자신의 불운을 답습하지 않도록 석담(石潭)이 배려한, 그런 아들 아닌 아들을 내치려고 보내준, 학교 공부를 고죽이 소학교만 마치고 그만둔 일이었다. 그 대목에서 작가는,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던 것처럼 가벼운 어조로 고죽(古竹)의 생각을 담담하게 옮겨적고 있다. 그러나 그가 시치미를 떼면 뗄수록 우리에게는 그의 트라우마가 울부짖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아마, 공명(共鳴)의 이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