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감언이설(甘言利說)⑤

은빛강 2012. 4. 17. 01:37

인문학 스프 - 時俗
감언이설(甘言利說)⑤ - 각광 증후군

언젠가 『음식남녀』라는 영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식색(食色)’은 영원한 인생의 바운드 모티프(bound motif)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영화 제목이 뜻하는 의미에서의 ‘색계(色界)’ 이야기 한 토막 할까 합니다. 친한 후배 동료가 제게 자주 하던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든 조금만 틈만 보이면 마감을 꼭 그쪽에서 하고 싶어 했습니다. “남녀 없이 얼굴 좀 생긴 것들은 꼭 한 수 접어주기를 바란다니까요.” 그렇게 말입니다. 저는 아직도 그가 그런 말을 한 전후 맥락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본인도 좀 생긴 편인데, 왜 그렇게 ‘생긴 것’들을 타박하는지 그 까닭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외모가 좀 된다 싶으면 반드시 ...한 수 접어주기를 의식, 무의식적으로 강요한다는 겁니다. 그것 좀 웃기지 않느냐는 거지요. 그의 말을 처음 듣고는 그 말의 배경(코드와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웃어 넘겼습니다. 꼴볼견인 주변의 모모한 인사들을 겨냥한 일상적인 표현(비웃음이거나 빈정거림)이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음전한, 체면을 아는, 교양 인사가 그렇게 반복적으로 지적할 때는 무언가 한 번 살펴볼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런 느낌을 받게 된 사정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라고 했습니다. 뭘 그런 걸 묻느냐고, 워낙 진중한 사람인지라, 자세한 건 듣지 못했습니다. 표정으로 봐서는, 만고불변의 진린데 따로 무슨 설명이 필요하냐는 투였습니다. 그러나 느낌은 왔습니다. 제가 언젠가 “너는 얼굴부터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놈이다”라는 말을 들었던 경험이 조금 도움을 주었습니다. 연극 무대에는 맡은 배역에 따라 배우가 들어오고 나가는 방향과 서 있는 위치가 정해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역을 맡은 공주는 항상 무대 오른 편에서 등장하고 그녀를 시중드는 시녀는 항상 왼쪽에서 등장합니다. 서 있는 위치도 그런 식으로 고정됩니다. 주인공들은 또 항상 정면을 향해 말합니다. 자기 곁의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 없다’는 거지요. 이를테면 매사 그런 식이라는 겁니다. 자기들의 위치(위상)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으로 여기고, 그들 ‘얼굴 좀 생긴 것들’은 언제나 상황을 그런 그림으로 몰고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얼굴 좀 생긴 것들’은 항상 ‘공주(왕자)’로 군림한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 이외의 사람은 ‘시녀(시종)’고요. 그는 그런 식의 일종의 꼴볼견, 이를테면 ‘얼굴 좀 생긴 것들의 각광(脚光) 증후군’을 나무라고 있는 거였습니다(‘각광 증후군’이라는 말은 제가 만든 말입니다). 물정을 좀 알만한, 몰골 멀쩡한 치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이해하기 힘든, 꼴볼견 차원의 자아도취증, 질병적 차원의 나르시시즘을 타박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이제 여러 사람한테 불편함을 준다는 거지요. 인간은 어차피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각광(脚光)’에 연연하는 치들이 한데 섞여있으면,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의 존재방식을 불문곡직 관철시키려 들면, 반드시 여러 사람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각광 증후군’을 ‘얼굴 좀 생긴 것’에 한정하고 있는 것이 나로서는 좀 불만입니다. 그가 그것을 어떤 맥락에서 주로 관찰하고 발견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증세’는 주로 ‘식색(食色)’ 중 ‘색(色)’과 관련될 때 보다 첨예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좀 덜한데 늙어서도 그런 모습을 보일 때는 정말이지 꼴볼견입니다. 여자들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그런 ‘각광 증후군’이 반드시 ‘얼굴’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겪은 바로는 ‘얼굴’보다는 ‘태도’입니다. 그걸 요즘 사람들은 ‘매너’라고 부르는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얼굴’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그 비중이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둘 다 갖추면 금상첨화이겠습니다만, 어느 것 하나만 주어진다면(필요하다면) ‘태도’ 쪽이 단연 우세를 점합니다. 다음의 인용을 참조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요조(『인간 실격』의 주인공)가 다음 단계로 사용하는 방어기제가 다름 아닌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이다. 투사적 동일시는 자신의 위험한 속성을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밀어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그러한 속성을 끌어낸 다음, 그를 조정함으로써 자신의 충동을 조절하려는 시도다. 예컨대 요조는 여자를 자극해 자신에게 빨려들게 해 놓고 막상 성 관계에 들어가서는 자신을 여자에게 겁탈당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여자가 나쁜 역할을 하게끔 무의식적으로 유도해 자신은 선량한 희생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김혜남)]

‘각광 증후군’을 가진 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투사적 동일시라는 방어기제를 전문적으로 사용합니다. 상대를 유혹자로 만들어 자신을 유혹하게 하는 것이지요. 자신은 그 유혹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사회적 비난과 같은 일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모든 것을 면제받습니다. 그들이 쓰는 기술은 보는 이로부터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교묘하고 능란합니다. 인격이나 교양으로 위장되는 수준이 거의 혼연일치의 경지입니다. 일단 그의 마법(?) 안으로 들어가면 꼼짝 못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그의 투사적 동일시의 각본대로,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감미로움에서 벗어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들은 어느 집단 안에서든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상대 성(性)에게서 ‘유혹’을 받아냅니다. ‘요조’라는 소설 주인공이 그런 면모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도 살아오면서 그런 ‘각광 증후군’ 환자들을 여태까지 여남은 명은 족히 봐 왔습니다(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남자 쪽은 ‘얼굴 좀 생긴 것들’이 절반에 미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얼굴 좀 안 되는 것들’이 더 많았습니다. 개중에는 처사(處士)도 있고 댄디도 있고 냉혈한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꼭 ‘얼굴’만 탓할 건 아닙니다.
모든 정신과적 질환이 대개 그렇습니다만, ‘각광 증후군’은 한 평생 같이 가는 것입니다. 남자의 경우는, 노인대학에서도 물론이고, 죽어 무덤에 묻혀서도 여자 귀신들 사이에 묻히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거의 고질(痼疾)입니다. 불패의 불치병이지요. 어릴 때 거절당한 상처가 너무 깊게 나 있기 때문에 일단 발병하고 나서는 웬만해서는 고치기 힘든 병입니다. 주로 경쟁력 있는 동생을 둔 형이나 언니에게서 많이 발견됩니다. 다음의 설명도 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방어기제는 요조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인간 구실을 못하는 열등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요조는 성인이 된 후 이 험난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음을 발견한다. 그러자 요조는 ‘회피(avoidance)’와 ‘퇴행(regression)’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회피는 위험한 상황이나 대상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요조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회피한다. 그는 사회로 뛰어들기보다는 방 안에 틀어박혀 사회를 비웃고 경멸하는 쪽을 택한다. 즉 그는 사회를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기력한 패배자로서의 자신에 대한 열등감이 남는다.
이 열등감을 방어하기 위해 그는 어린 시절로 퇴행한다. 퇴행이란 심한 좌절을 겪을 때 현재보다 유치한 과거 수준으로 후퇴하는 것을 일컫는다. 요조는 구강적 시기로 퇴행하여 술과 담배를 입에 달고 산다. 엄마의 젖을 빨듯이 담배를 빨고, 술에 취해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느낌에 젖어 사는 것이다.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김혜남)]

열등감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열등감을 넘어서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상처에서 진주가 영글듯이, ‘승리하는 인간’이 되기도 합니다. 동일시, 상징화, 승화, 합리화, 대체 형성, 이타주의와 같은 성숙한 방어기제들의 도움을 얻어 불안을 극복하고 ‘승리’와 ‘평안’이라는 ‘두 손의 떡’을 모두 얻을 수도 있다고 프로이트 선생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문제는 늘 남습니다. 정작 이 이야기가 필요한 사람은 이런 글을 읽지 않는다는 겁니다. 설혹 읽는다 해도 우이독경입니다. 스스로를 깨뜨리기 전에는, 그 어떤 치유의 말도 전혀 체내로 흡수되지 않습니다. 그저 징징거리는 소음에 불과합니다. 사로잡힌 영혼들의 세상은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합니다. 그러니 그들 앞에 서면 어쩔 수 없이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주 앉아도 차 한잔 나누지 못하고 그냥 일어서야 합니다. 서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저는 담배를 끊어서 다행입니다. 술도 못 마셔서 천만다행입니다. 엄마 젖을 빨거나, 엄마 품에 안겨서 산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어서, ‘퇴행’이라는 낙인을 면할 수 있어서, 정말이지 천만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찝찝한 게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각광(脚光)’에 대해 쓸데없이 너무 많이 안다는 게 좀 불안하고요(용어까지 만들면서),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느낌’도 좀 그렇습니다. 글에 취해도 그런 느낌은 들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