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감언이설(甘言利說)④

은빛강 2012. 4. 17. 01:39

인문학 스프 - 時俗
감언이설(甘言利說)④ - 추성훈이라는 기호

‘추성훈’이라는 기호가 있습니다. 그를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누구든 보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선량(善良)한 기호(記號)입니다. 정치인들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습니다. 또 어떤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백발백중 선거에서 떨어집니다. 선거 포스터에 사용된 얼굴 중에 웃지 않는 얼굴이 거의 없는 것도 그 까닭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때 저는 모든 선거는 전적으로 ‘얼굴’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적어도 추성훈이라는 인물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얼굴’에 좀 과민했던 것은 따로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부담스러운 얼굴’이라는 걸 처음 안 것은 대학 학부 시절이었습니다. 4학년쯤 되었을 땝니다. 평소에 다소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같은 학과 1년 선배(삼수생)에게서 대놓고 그런 언질을 받았습니다. 아마 자주 가던 시내 다방에서였지 싶은데, 우연히 합석한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 끝에 그로부터 “너는 얼굴부터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놈이다”라는 취지의 악담을 들었습니다. 쓸데없이 시건방지고, 선배 몰라보고, 잘난 척은 독판으로 하고, 쥐뿔도 내세울 건 없는 놈인데, 벌써 생겨먹은 것부터가 비호감이지 않느냐로 들렸습니다. 그러는 너는? 머리에 든 것도 없이 머리는 길고 얼굴 평수만 넓어가지고는, 그것도 모자라 공연히 꾸부정하게 해서는, 괜스리 온갖 심각한 표정이란 표정은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면서, 고작 하는 일이라고는 후배들 앞에서 똥폼이나 잡는 주제에 누구 얼굴에다 대고 가타부타냐?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으니,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던 적이 있었습니다(이건 전적으로 그때 생각입니다). 그도 웃으면서 그런 말을 던졌으니까요. 어쨌든 그 말이 제게는 좀 충격이었습니다. 내 얼굴이 비호감이라니, 그때까지 저는 제 얼굴이 ‘호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비호감’은 아니라고, 어느 정도는 선한 이미지일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이라는 말을 들으니 내심 깜작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때까지는 주로 우호적인 교우 관계 속에서만 지내왔던 터라 그런 모진 말을 들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선배가 자기를 전혀 선배 취급하지 않았던 저에게 적지않이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던 것이 그러한 ‘모진 얼굴 평가’의 주된 원인이었지만(다른 문우(文友)들은 그를 **형이라고 불렀지만 저는 끝까지 **씨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서로 작가가 되어 서울에서 만났을 때 마지못해, 좌중을 의식해, **선배라고 불렀습니다), 어쨌든 그 뒤로 스스로의 이미지에 대한 수정 작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갑자기 이야기가 추성훈에서 엉뚱하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얼굴’ 쪽으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보기에 좋은 사람과 보기에 거북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저도 ‘보기에 거북한 사람’ 중에 속했던 적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추성훈이 ‘보기에 좋은 사람’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오늘 생각해 보려는 것은 바로 그 문제입니다. 얼굴로 치면, 저보다는 추성훈 쪽이 훨씬 더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이지요. 그가 눈이라도 한 번 부릅뜨면 왠만한 사람들은 그냥 주눅이 들 겁니다. 그의 눈빛에 따라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험’과 ‘악’이 공존하는 평면이 됩니다. 그런데 그가 눈웃음을 치며 어눌한 한국어 솜씨로 애교를 떨 때면 오로지 ‘선’과 ‘량’만 있는 얼굴이 됩니다. 격투기에 임할 때의 얼굴은 또 어떻습니까? 그 처절한(?) 진지함에 관중들은 또 압도됩니다. 그러니까, ‘얼굴’은 아닌 것 같습니다. 추성훈이라는 기호를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얼굴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옷맵시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비슷한 터프 가이이지만 추성훈은 최민수 스타일은 아닙니다. 늘 단정합니다. 그의 얼굴과 그의 복장은 묘한 앙상블을 이룹니다. 부조화의 조화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보기에 좋은 옷맵시입니다. 그 다음은요? 그가 보기에 좋은 것은 또 무엇이 있을까요? 이른바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미, 세칭 식스팩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무심결에 옷 안에 감추어진 그의 아름다운 신체를 생각합니다. 그의 몸이 마치 내 것이나 되는 듯한 착각도 간혹 듭니다. 그의 몸에 대해서 여성들이 느끼는 모종의 미세한 무의식적 감성 같은 것은 저로서는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것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무엇이 있을까요? 누가 그의 탈이념성, 혹은 무국적성도 매력의 한 포인트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댄디와 마초라는 상극적인 것의 절묘한 융합과 더불어 그런 후기 산업사회의 나르시시즘적 소비 특성을 만족시키는 그의 시대성 있는 캐릭터 성향이 때맞추어 유효타를 날렸다는 겁니다. 그는 ‘거절당한 경험’ 속에 웅크리고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발판삼아, 도전적으로, 무국적성으로, 딛고 일어서서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즘 소비 행태가 지배하는 후기산업사회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는 겁니다. 그 덕분에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을 그는 이룰 수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면, 추성훈이 ‘보기에 좋은 사람’이 되는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설명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이 말씀을 드리고 있는 거구요. 추성훈이라는 기호는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우연의 일치 같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의 성공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결연한 선택과 부단한 노력의 결과입니다. 그 결과가 후기산업소비사회의 한 특성(나르시시즘)을 기대 이상으로 만족시킨 것은 그의 행운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것 아니더라도 그는 다른 이유를 대동하고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게 맞습니다. 그 역시 ‘오래 지속되는 인간’입니다. 그는 무엇의 결과가 아니라 한상 원인으로 작용하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왜 추성훈인가’ 묻고, 기호학적인 설명을 늘어놓는 것은 언제나 ‘덜 된 논법’입니다. ‘추성훈’은 피와 땀과 눈물의 소산입니다. 거기에는 논리가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천재가 하는 일에는 원인이 없다’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집니다. 추성훈은 ‘설명될’ 존재가 아닙니다. 추성훈이 지니는 댄디와 마초, 그 묘한 상극적인 것의 융합과 탈이념적(국가, 민족적) 정체성은 그 자신의 실존을 뭉개버리려는 것들에 대한 강력한 저항 수단이며 유일한 존재증명의 수단이었습니다. 저급한 것들에 의해 자행된 모독과 모욕들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분노,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끝까지 가지고 가야할 자존심과 자기애, 한 인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용서하고 넘어서고 고수한,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바로 ‘추성훈’이라는 기호입니다. 그것을 고작 책상머리에서 굴리는 잔머리 속에서, 세 치 혀끝에서,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참으로 우둔하고 유치한 일입니다.

우리가 볼 것은 ‘추성훈’이라는 기호가 지닌 모종의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인간만이 획득할 수 있는 생명의 에너지입니다. 윌리엄 포크너가 말했듯이 ‘인간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의 성공입니다. 말하자면, 그를 통해서 어디로부턴가 선물로 온 인간만의 생명력, 인간의 승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로 인해 그는 ‘보기에 좋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한 ‘어눌한 경계인’이 일약 광고계의 신데렐라로 부상하고, 드라마에 깜짝 출연도 하고,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와 즐거움을 주는 것을 고작 후기 산업사회의 한 ‘소비행태’와 연관짓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그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