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감언이설(甘言利說)⑥

은빛강 2012. 4. 17. 01:34

인문학 스프 - 時俗
감언이설(甘言利說)⑥ - 부러진 화살

고등학교 친구 중에 확실히 머리 좋은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올라와 군계일학(群鷄一鶴), 반에서 1등을 도맡아서 하던 친구였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하숙을 하고 있어서 심심할 때면 그 친구 집을 들르곤 했습니다. 하루는 친구 얼굴도 보고 공부 방해도 좀 하고, 겸사겸사 들렀더니 그 친구가 마당에 앉아서 앉은뱅이책상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앉으나 서나’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는 건데, 수고스럽게 여기저기서 나무를 주워다가 재미있다며 톱질을 하고 망치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할 일 없던 나는 그 옆에서 영어 사전을 들고 단어 테스트를 했습니다. 주로 작게 인쇄된, 구석진 단어들만 골라서 물었습니다. 친구는 그때마다 “잘 모르겠는데...... 혹시 ** 아이가?”라고 답했습니다. 어이없게도 모두 백발백중이었습니다. 그것들을 하나 없이 다 맞추는 거였습니다. 친구 사이였지만 그 대목에서 존경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도 과외가 성행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본인 집에서 ‘돼지’들을 키웠습니다. 그렇지만 그 친구는 그런 호사를 누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공부의 신’이었습니다. 성격도 온화했고 행동거지도 늘 정제(整齊)되어 있었습니다. 타고난 영재(英才)라고 할 수밖에 없는 아이였습니다.
요즘 ‘영재 교육’이라는 말이 성행합니다. 그 정의를 봤더니, <지능>, <과제집착력>, <창의성>이라는 세 개의 원이 공집합(맞나?)을 이루었을 때 영재성이 발로된다고 적혀 있었다. 그 글을 쓴 사람은 아마 영재 출신이 아니지 싶은데(진짜 영재들은 그런 글이나 쓰고 있을 리 없습니다), 그 말이 영재를 다 설명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정의(情誼)적인 부분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 허접한 정의로만 보더라도 그 친구는 명불허전(名不虛傳), 영재임에 분명했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 현직 판사로 재직 중입니다.
『부러진 화살』(정지영, 2012)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전문가와 비전문가, 집단 생리학, 분노의 사회학, 그리고 그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다음은 영화를 보고 난 후 느낀, 간략한 개인적인(주관적인) 소감입니다.

전문가와 비전문가 : 영화를 보면 ‘법대로 하자’는 말이 자주 나온다. 주인공 김교수가 주로 하는 말이다. 그 말에 판사들은 늘 ‘그렇게 하고 있다’고 응답한다. 영화 안에서, 그 두 ‘말’은 끝까지 평행선을 달린다. 왜 그럴까? ‘말’ 전문가 입장(이 표현은 자조적인 것으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에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김교수의 주장은 ‘법대로 하자’가 아니고 ‘법전에 기록된 말대로 하자’로 이해된다. 그리고 판사들의 말은 ‘법 정신을 살려서 판결(판단)한다’로 이해된다. 그렇게 보면 결국은 양자 간의 불화와 갈등은 ‘말’과 ‘법’을 어떻게 볼 것인가와 깊은 연관이 있다. ‘말’이 전부인 것으로 보는 이와 ‘말’이 말하지 못한 부분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와의 대립, 곧 비전문가와 전문가의 대립인 것이다. 전문가는 그 분야의 ‘말’을 독점적으로 소유한 자다. 그런데 비전문가인 김교수가 그 소유권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교수는 ‘말’의 희생자였고, 자신 스스로의 구제를 위해서는 ‘말’을 뒤집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제적 개인인 김교수는 옥중에서 시종 ‘말’의 성찬인 법전을 끼고 산다. 자신의 사회적 모태로부터 강제로 분리된(낙태된) 원체험이 그를 편집증으로 몰고간다. 오직 ‘말’만이 자신이 당한(당하고 있는) 불선(不善)의 실체를 밝혀줄 것이라고 여긴다. 사람은 믿을 수 없고, ‘말’만이 희망이다. 그는 그렇게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판사들은 그렇지 않다. 자신들은 법전이라는, 최고의 공신력을 자랑하는 ‘말’을 운용하는(해석하고 적용하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 영역에서 최소 원칙인 ‘말’의 절대성만을 신봉하는 비전문가로부터 도전받는 것을 누구보다도 싫어한다(누구는 비전문가에 의한 전문가 집단의 통제야말로 민주주의의 관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상대는 자신들을 위해(危害)하는 테러범이다.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법정에서의 싸움은 김교수의 패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제 싸움은 법정 밖으로 나와서 계속된다. 김교수 쪽에서 싸움에 사용되는 ‘말’을 바꿨다. 전문가의 그것이 아니라 비전문가의 그것으로 바꿨다. ‘비전문가들의 전문가 집단 통제’라는 포맷 안에서의 싸움으로 확전되었다. 공방의 패러다임도 크게 바뀌었다. 김교수가 먼저 “세상에 전문가가 어디있어요? 사기꾼이라면 몰라도”라고 외쳤다.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집단 생리학 : 김교수가 최초로 ‘낙태’된 곳은 대학이다. 입시 문제에 하자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 과정에서 집단에 해를 끼치는 문제적 개인(불량 세포)으로 낙인이 찍혔고, 집단 생리학적 관점에서 소거되어야 할 악성 종양으로 간주되었다. 재임용에서 그가 탈락된 것은 그 이유에서이다. 교육자적 자질이 의심스럽다고 했을 것이다. 국립대학이었다면, ‘품위 유지 의무 위반’이라는 공무원법상의 조항이 적용되었을 공산이 크다. 어떻든, 사회적 체면 유지가 중요시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신의 결정적인 한계나 불찰을 스스로 발견했을 때 이상 반응을 일으킨다. 변태로 흐른다. 비정상적인 방어기제가 발동한다. 투사(projection)가 횡행한다. 자신의 죄를 남에게 뒤집어씌운다. 그래서 희생양을 만든다. 김교수는 그렇게 만들어진 희생양이다. 대학에서는 크든 작든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경험칙으로 그렇다. 대학은 본디 가면(假面)이 많은 곳이다. 구성원들이 애써 유지하려고 했던 체면유지용 ‘가짜 얼굴’들이 모두 벗겨진다면 대학은 존립 자체가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가면을 벗은 맨얼굴들은 추하기 그지없다. 모두 악마에게 영혼을 판 얼굴들이다. 안에서 제기된 이의(異義)가 묻혀지고 무시되는 과정을 보노라면 오히려 외부의 힘이 외과적 수술을 요구할 때보다 더 심각한 병리적 상태가 동반된다. 자칭 엘리트(영재?) 집단, 전문가 집단을 자처하다보니 대학 사회는 한층 더 나이브하게 그런 작태가 벌어진다. 평소에도 몇몇 떼거리를 가진 자들이 ‘분노의 사회학’을 교묘하게 끌어들여 자신의 사적 욕망을 실현시키기에 급급한 것이 교수사회다. 그런 자신들의 기득권에 위해를 안기는 문제 제기를 그냥 두고볼 수가 없다. 왜 사소한 실수 하나를 책잡아서 교수 사회 전체(사실은 소수의 과실 책임 집단)를 매도하느냐고 선동해서 선의의 내부 고발자, 혹은 혁신 마인드의 경영자(총장 등)들을 매장시키고 도태시킨다. 약점을 잡고 언론을 동원한다(총장직선제는 만병의 근원이다). 김교수의 경우는 그런 교수 사회의 악습과 병폐에 의해 희생양이 된 경우다. 우리대학은 명문대학을 지향하는 입장인데, 그래서 사회적 명망도의 유지가 필수인데, 1등 재단인데(사립학교에서는 재단의 입김도 무시 못한다), 입시문제에 오류가 있다니 그건 말이 안 된다. 덮고 가야한다. 우리가 우리를 보호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보호하는가, 동료들의 안위를 우선시하지 않고 공명심에 날뛰는 저 자를 그냥 둬서는 안 된다. 다수인 우리는 양이고 소수인 저 자는 늑대다. 그런 식으로 그를 매도해서 사회적 모태로부터 강제 분리해 버렸다. 낙태를 시킨 것이다. 영화가 그 부분을 후경화하고 사법부의 독선과 권위주의적인 법정 관리(운영)만을 전경화시켜 질타한 것은, 교수의 한 사람인 나로서는 큰 불만이다. 먼저 대학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사법부가 전능한 곳은 아니다. 사법부 자신도 그것을 안다. 전문가들을 인정한다. 대학은 전문가 집단이므로 그 전문가들이 결정한 것을, 외부 전문가의 입장에서, 자의적으로 뒤집을 수 없다는 원칙을 그들은 꼭 지킨다(설혹 그들이 복직을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대학에서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복직을 저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발본색원(拔本塞源), 대학부터 잡았어야 했는데 표적지가 좀 잘못 걸린 것 같았다. 아마 영양가가 없었던 모양이다(아니면, 힘에 부쳤거나). 흐지부지 넘어갔다. 그래서 영화 자체가, 마치 증거 제1호인, 실종된, ‘부러진 화살’과 비슷한 느낌을 선사한다. 무언가 미진하다. 그렇게 보면 이번 영화에서 악역을 도맡은 판사들 역시 비전문가들의 폭력에 희생된 ‘선의의 희생양’들이다(이때 ‘선의’는 법률용어다).

분노의 사회학 : 분노가 만능은 아니다. 참을 때는 참아야 한다. 내가 김교수와 비슷한 일을 겪고 비슷한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한 뒤, 많은 것을 잃은 뒤, 얻은 교훈이다. 때를 기다려, 지원군을 기다려, 일거에 악당들을 기습, 일망타진해야 한다.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시간이 그걸 해결해 준다. 그때가 왔을 때,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여야 한다.’ 그게 악을 소탕하는 방법이다. 악은 강하고 민생(民生)은 엄연하다. 살기 위해서 주어진 직분에 충실한 가난한 이웃을 원망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만약 때가 오지 않는다면, 복수가 여의치 않다면, 그냥 죽어지내야 한다. 그게 내가 얻은 삶의 지혜다. 공연히 나섰다가는, 어떤 형태로든 낙태 시술을 당하고,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이런 글이나 쓰고 있어야 한다. 영화 『부러진 화살』이 좋은 반향을 일으켜 김교수의 복직(보상)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