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감언이설(甘言利說)⑩

은빛강 2012. 4. 17. 01:31

 

인문학 스프 - 時俗
감언이설(甘言利說)⑩ - 묵은 흙을 털어내며

배양토를 사다가 분갈이를 했습니다. 그렇게 화분을 뒤집어 묵은 흙을 털어내는 일도 참 오래간만에 해 보는 일입니다. 3,4년 동안은 화분 근처에 잘 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화분을 흔들어서 뿌리를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냈습니다. 손 안에서 흘러내리는 흙들이 벌써 푸석푸석한 것이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예전에는 봄이 올 때마다 매년 분을 갈아주던 때도 있었습니다만, 요즘 들어서 화분 갯수가 대폭 줄어들면서 그 연례행사에 눈에 띄게 소홀해졌습니다. 화분이 적어지면 더 알뜰하게 간수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게을러졌던 것입니다. 아마 그 일이 ‘중요한 일’의 목록에서 아예 누락되어서일 것입니다. 그동안의 무관심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준 몇 남지 않은 군자란, 문주란들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기적으로 해야 될 일이 분갈이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한 번씩, 자신을 포함해서 주변의 것들을 털어서 묶은 것들을 쏟아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 번씩 ‘뒤집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대대로 새 흙을 공급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새것이 보입니다. 물건도 그렇고 생각도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무사하고 좋아 보이는데 뒤집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멀쩡해 보였지만 허점투성입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믿는 것도, 물건처럼, 박음질이나 마감이 제대로 안 된 것들이 많습니다. 그 반대도 물론 있습니다. 겉은 고만고만, 별것 아닌 듯했는데 뒤집어서 안을 보면 사람을 놀라게 하는 대물(大物)도 있습니다. 일전에 영화배우 차인표씨가 TV에 나와서 그런 이치를 한 번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가, 자신들을 기다렸다가 반갑게 손을 내민 어린 인도 소년의 손을 잡는 순간 ‘확 뒤집어졌다’는 말을 할 때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구제하러 간 이들이 오히려 구제받고 왔다는 그의 말이 큰 울림을 선사했습니다. 그렇게 돈오(頓悟)하고 꾸준히 그 마음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할 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어쨌든 전에는 ‘형편이 되니까 그런 봉사활동도 하는 거겠지’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앞으로 크게 한 번 뒤집어져야겠다는 가르침을 톡톡히 얻었습니다.

문화도 마찬가지지 싶습니다. 한 번씩 갱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문화는 인간이 자신의 부족하고 ‘불안정 한 것’들을 보충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대로 두면 ‘야만(野蠻)’에 머무를 것들을 문화를 통해 순화시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지금까지 야만과 문화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문화도 가끔씩은 과속(過速)을 범할 때도 있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그 의의가 몰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의 재정의, 재정립이 요구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것도 ‘뒤집어 보기’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래 인용한 글(『게으름뱅이 정신분석』,)도 그런 ‘뒤집어 보기’의 한 실례가 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책에서 ‘환상(幻想)’이라는 개념으로 인간 사회를 뒤집어 봅니다. 모든 집단적 신념이나 규범, 그리고 제도는 일종의 ‘환상 공유’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절대적 기준은 따로 없고, 오로지 공유된 환상(★꿈은 이루어진다?)만이 제도와 규범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불완전, 불안정한 존재로 보는 관점이 재미있고, 그렇게 뒤집을 때 얻게 되는 소득도 만만찮다는 것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이런 글의 단점은 물론, 단순화 ․ 단선화가 불러오는 논리의 맹목성입니다. 이 글에서도 그런 맹점이 발견됩니다. 인간의 행위 모든 것이 반드시 공동 환상과 사적 환상으로 대별되는 기원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예술적 행위로 실현되는 예술가의 초자아는 항상 공동 환상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위인(偉人)들의 삶도 그렇습니다. 보통 위대한 공동 환상은 한 극단적인 사적 환상의 ‘자기 연장(自己延長)이나, 존재증명(存在證明)’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여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 같은 이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전쟁 영웅이었지만, 모함을 견디면서 백의종군까지 불사하고, 선조로부터 면사장을 받고, 보다 안락한 삶을 추구할 수도 있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적을 끝까지 쫒다가 결국 전장터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당시의 공동 환상에 충실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사적 환상을 극한까지 밀고 나간 것이었는지, 쉽사리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안중근 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위대한 공동 환상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때 그 장소에서는 그 누구도 그를 따라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비롯한 극소수의 사람들만 몸으로 구현했던 신념(이념)이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사적 환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한 인간의 삶을 완벽하게 규정하고 구속하는 단계나 수준을 도외시하고, 그저 허울뿐이 구호에 지나지 않는 것을 두고서, 공동 환상의 사적 환상 흡수 운운하는 것은 자칫하면 궤변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우리를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왜 환상이 필요한가? 그런 물음을 다시 한 번 스스로 던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인간집단은 불안정하다. 집단은 무한히 확대를 계속해갈 수는 없는 것이고, 그것을 지탱하는 공동환상(共同幻想)은 결코 개개인의 사적환상(私的幻想)을 완전히 흡수할 수는 없다. 개개인에게 나누어진 공동환상은 초자아 및 자아가 되고, 공동화되지 않고 남은 사적환상은 이드를 구성한다. 이 이드가 공동환상에 기초하는 집단의 통일성을 내부로부터 위태롭게 하는 중대한 요인이 된다.
정신병자는 그 사적환상의 태반을 공동화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사는 사회의 공동환상을 일단은 외면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사적환상과 아무런 내면적 관계도 없는 것으로, 그는 그곳에 자신의 사적환상의 공동화를 볼 수가 없다. 그의 사적환상은 그 자신 홀로의 자폐적 세계 속에서 증식하여, 일단은 적응하고 있는 허위의 외면을 끝내는 꿰뚫고 튀어나온다. 곁에서 보면, 그것이 곧 발광이다. 발광은, 어느 의미에서는, 사적환상의 실패한 공동화의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사적환상이 망상으로 불리는 것은, 그 밖의 어느 누구 하나도 그곳에 한 조각의 공동성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인류의 문화 자체가 그 구석구석까지 환상으로 지탱되어 있다. 개인이란 것은 갖가지 사적환상을 갖는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적환상이 모두 사적인 것으로 멈추어 있는 한, 타자와의 관계는 있을 수가 없다. 최소한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으려면, 두 사람 각자의 사적환상을 부분적으로나마 흡수해서 공동화할 수 있는 공동환상이 있어야 한다. 그 공동환상에 두 사람이 각자 그 사적환상의 연장을 보고 그 사적환상을 종속시킬 때 비로소 두 사람 사이에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금전의 가치를 예로 들어보자. 그 가치는 같은 환상을 공유하는 사람에게밖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이 환상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유아나 미개인)에게 그것은 전혀 무용지물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적 문제는 공동환상으로 귀결된다. 인류 집단의 안정과 동요, 발전과 퇴보는 문제적 개인들의 사적환상이 어떤 방식으로 공동화되는가, 혹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성공하고 실패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기시다 슈(우주형), 『게으름뱅이 정신분석』 중에서]

지금 우리 사회의 공동 환상이 무엇인지, 4년 혹은 5년마다 주기적으로, 그 목록을 확인하는 절차가 목전으로 다가왔습니다. 선거라는 제도는 우리가 공유할 공동 환상을 다수결로 정하는 절차입니다. 그 선택은 그러므로 우리의 사적 환상들을 한군데로 귀속시키는 자기 규제적 행위입니다. 그만큼 신중하고 단호해야 하는 실천적 행위입니다. 이때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은 선거에 나서는 ‘문제적 개인’들이 보여준 ‘사적 환상의 공동 환상화 과정’일 것입니다. 스스로 한 극대치를 보여준 인물의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의 ‘환상’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저의 주변에서도 그런 ‘극대치 환상’을 몸소 실천한 분들이 많이 선거에 출전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극대치 환상’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거의 정신병 수준인 공고한 지역색에 밀려 인정받는 ‘공동 환상’의 자리를 선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메아리 없는 공허한 발언이 될지언정 저도 한 마디 해야 되겠습니다. 어느 선거후보자의 슬로건처럼 ‘속이 터지기’ 때문입니다. 얼치기 지역감정이나 뜨내기 발전 공약이나 내거는 자들의 위장된 ‘공동환상’을 믿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그것은 문화의 혜택을 입지 못한 야만(野蠻)의 행위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나는 이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나는 이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이기 때문에, 나는 이 지역의 가진 자에 속하기 때문에, 당연히 어느 당 후보를 찍어야 된다’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한 번 스스로를 뒤집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너무 화분갈이에 무심했습니다. 화분 속의 묵은 흙을 한 번 털어내십시오. 썩은 뿌리가 있으면 잘라내십시오. 그리고 군자란이든 문주란이든, 무관심을 견디며 꿋꿋하게 버텨온 푸른 잎들을 한 번 봐주십시오. 사람을 보십시오. 사람은 다 똑같지 않습니다. 야만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리고 구제받으십시오. 위의 인용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우리 민족 집단의 안정과 동요, 발전과 퇴보는 결국 그 문제적 개인들의 사적환상이 어떤 방식으로 공동화되는가, 혹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성공하고 실패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후손들의 삶은 결국 오늘의 우리 선택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부디 신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