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감언이설(甘言利說)⑨

은빛강 2012. 4. 17. 01:30

인문학 스프 - 時俗
감언이설(甘言利說)⑨ - 도깨비 이야기

한국의 도깨비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게 궁금해서 여기저기 ‘도깨비 그림’을 찾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잘 찾아지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에게 도깨비는 ‘심리적 실체’일 뿐 ‘물리적 실체’는 아니었구나라는 짐작을 했습니다. ‘도깨비 같은 놈’은 많아도 정작 ‘도깨비 얼굴’은 남겨진 게 없었습니다. 최근에 우리 판타지의 역사와 연관해서 다시 관심이 일어서 브리태니카 사전을 조회했습니다. 얼마간 요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필요한 부분을 약간 손을 봐서 소개합니다.

도깨비 : 한국 전래 신격(神格)의 하나. 옛날에는 '독갑이' 또는 '귓것'으로도 불렸으며 한자로는 독각귀(獨脚鬼) 등으로 표현되었다. 독가비의 가비는 갑과 동의음이고 갑과 귀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어로 '독가비'라는 말은 1458년 『월인석보 月印釋譜』의 '돗가비니'에서 온 말이다. 현재 도깨비에 관한 다른 이름은 매우 많다. 전라도에서는 도채비·도체비·도치기, 다른 지역에서는 도까비·토재비·토째비·톡깨비·홀개비·홀깨비·도깨기·도째비·터깨비 등으로 부른다.
한자의 귀(鬼)를 도깨비로 알지만 도깨비와 귀(鬼)는 다르다. 귀(鬼)는 주로 일본의 도깨비들이다. 일본의 도깨비는 나타나는 장소나 사는 곳에 따라 산도깨비·물도깨비·바다도깨비·수풀도깨비 등으로 분류한다. 환시·환각·환청과 같이 경험자의 심리적인 태도를 기준으로 분류하는 방법도 있는데 소리로 들리는 것은 환청(幻聽), 형체로 나타나는 것은 환시(幻視), 또는 환각(幻覺)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불완전하다. 환(幻)으로 보는 것은 결국, 도깨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도깨비 이야기들은 주로 일본의 귀(鬼) 이야기들이다. 이들은 성격이 음흉하기에 동굴이나 오래된 폐가, 옛 성, 큰 고목 등에 살고 밤에 나와 활동한다. 어느 도깨비나 모두 초인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서 도깨비 방망이로 돈과 보물을 내놓기도 하고 황소를 지붕에 올리기도 한다. 2중적인 성격을 지니며, 심술궂기도 괴팍하기도 하여 사람이 하는 일을 해코지하거나 혼내주기도 한다. 그런데도 괴이한 신통력으로 못된 놈은 골탕먹이고 착한 사람은 도와주는 친근성도 보여준다.
한국의 도깨비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눈에 보이는 도깨비는 인간의 모습과 불덩어리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지라도 날이 밝거나 승부에서 지는 경우, 그 정체가 빗자루·절굿공이·도리깨 등으로 밝혀진다. 인간의 손때가 묻은 것들이 함부로 버려질 때 도깨비가 된다는 속신이 존재한다. 도깨비불은 혼불로도 불리는데, 이런 불은 민간신앙 중에서도 속신성이 강하다. 도깨비불이 동쪽으로 가면 풍년이 들고 서쪽으로 가면 흉년이 든다는 믿음이 정월 보름날 유풍으로 전해진다. 속설에 도깨비불은 사람이 죽으면 뼈에서 인이 나와 밤하늘에 떠도는 빛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도깨비 중에서 씨름을 걸어오는 도깨비의 모습이 외뿔 달린 도깨비(일본의 오니)로 그려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인간과 교섭하는 도깨비는 언제나 사람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좀 특별하게 생길 수는 있다.(인터넷 브리태니커 참조)

도깨비의 한자 표기가 독각귀(獨脚鬼)라고 해서 중국 남방의 나무귀신이 도깨비의 원조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신라 시대의 비형랑(鼻荊郞, 581년 ~ ?)을 우리나라 도깨비의 시조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비형랑 이야기가 재미있었습니다. 어떤 원형(原型)이 보였습니다. 비형은 진지왕의 사후 사생아(私生兒)로, 진평왕 때의 인물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비형랑은 진지왕이 사량부의 미인 도화녀(桃花女)와 사통하여 낳은 자식입니다. 579년에 진지왕은 도화녀를 불러 후궁으로 삼으려 했지만 거절당합니다.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 해 진지왕은 폐위되어 죽었습니다. 2년 뒤인 581년, 도화녀의 남편이 죽자 진지왕의 귀신이 도화녀에게 나타나 사통한 결과 낳은 것이 바로 비형이었습니다. 출생부터가 귀(鬼), 혹은 요괴의 요소가 농후합니다. 그 후의 이야기들도 일종의 판타지인 지괴(志怪)류에 속하는 내용들입니다. 지금 보면, 현재 유행하는 일본의 요괴류(妖怪類) 이야기와 매우 흡사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누야샤』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많이 발견됩니다. 반인반요(半人半妖)의 주인공, 본체가 개나 여우인 요괴 인물의 등장, 인간을 능가하는 초월적인 힘 등, 공유하는 화소(話素)가 꽤 있습니다.

『이누야샤』는 주인공 이름이 제가 좋아하는 개(이누, いぬ)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관심이 많이 갔습니다. ‘이누야샤(犬夜叉)’를 우리말로 옮기면 ‘개 도깨비’가 됩니다. ‘이수일과 심순애’로 널리 알려진 『장한몽』의 원작이 『곤지키야샤(金色夜叉)』라는 일본 명치 시대의 소설인데, 이 경우는 우리말로 옮기면 ‘돈 도깨비’가 되지요. 둘 다 물론 충분한 번역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요괴(妖怪)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의 도깨비와 귀신은 좀 단순합니다. 우리 도깨비는 사람과 직접 점속할 때는 늘 사람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자연 현상의 일부로 남아 있습니다. 따로 제 모습을 가지지 않습니다. 귀신들도 그저 소복(교복?)에 산발한 원귀(寃鬼)로 나타나서(모두 여잡니다), “내 다리 내놔라~”나 “내가 아직도 친구로 보이니?”, 아니면 “(거꾸로 매달려서)우리집이다~”라고 겁을 주는 정도입니다. 그런 식이 일반적으로 영계(靈界)의 메신저들이 나타나서 하는 행태입니다. 일본처럼 독립적인 요괴의 캐릭터를 용인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멀리하는 유교 국가의 전통이 성립된 이후의 일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일본 서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8년간 유학을 공부하고 간 일본인 학자의 저술인데,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한국은 아직도 ‘공자의 나라’라는 겁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기철학’의 세례를 강하게 받은 나라입니다. ‘이기철학’이 지배하는 사회인만큼 요괴 따위가 서식, 혹은 잠식할 만한 어두운 구석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그는 지금 우리가 사용한 ‘있을 리가 없습니다’라는 표현도 이기철학의 소산이라고 말합니다). 합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에 비합리와 감정의 스토리텔링이 스며들 여지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의 주장을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리’의 민중과 ‘기’의 대중 : 그런데 이 민중과 닮았으면서도 다른 것으로 「대중」이 있다. 민중은 주체이든 객체이든 어쨌든 무구한 존재였다. 농민․노동자․도시 영세민 등, 권력에 억압․수탈․소외된 선량한 백성이었다. 그것에 반해 대중이란 <욕망=기> 쪽의 존재이며 ‘기가 탁한 객체’로 인식된다. 민중은 이념에 따라 지배․통제하기 쉽고 대중은 이념에 따라 지배․통제하기 어렵다. 민중은 이념을 믿지만 대중은 이념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운동체에게 있어서 민중은 바람직한 존재이고 대중은 멀리해야 할 존재였다. 또 대중은 욕망으로 지배․통제하기 쉽고 민중은 욕망으로 지배․통제하기 어렵다. 대중은 욕망에 살지만 민중은 욕망에 살지 않기 때문에. 그 때문에 경제적 헤게모니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체에게 있어서 대중은 바람직한 존재이며 민중은 멀리해야 할 존재이다. 이처럼 민중과 대중을 둘러싸고 정치 운동체와 경제 활동체 사이에는 날카로운 대립이 전개되고 있다.

그가, 하나의 실체를 ‘민중’과 ‘대중’으로 나누어 따로 관리하는, 우리 민족(언어)의 일종의 이중성, 혹은 이율배반성을 지적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가 보기에는 우리 민족은 이율배반적인 민족입니다. 앞뒤가 다르고, 속과 겉이 다릅니다. 모든 것을 이와 기로 나누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기들 말로 ‘앗싸리’ 하지 않은 족속이라는 겁니다. 그것 말고도, 그가 소위 이기철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는 한국적 사회상은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돕니다. 최순우 선생이 한국의 정원을 자연친화적인 것으로 설명하면서, ‘중국은 과장, 일본은 축소. 한국은 적절’로 설명하는 것까지 트집을 잡아서 ‘한국 사람은 자기 것이 없다. 오직 일본이나 중국과의 대타적 관계 위에서만 자기를 규정한다. 비교로만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민족이다. 그것도 결국 이기철학의 나쁜 영향이다.’라고 강변합니다. 얼핏, 그럴듯하게도 들립니다. 그러나 본디 바둑 두는 사람은 바둑으로 세상을 설명하고, 고스톱 치는 사람은 고스톱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법입니다. 명색이 ‘철학’인데 이기철학으로 설명되지 못할 것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 그의 논리는 결국 아전인수로 흐릅니다. 식민지 근대화 기여론에서 ‘다케시마는 우리 땅’까지, 없는 것 없이 그 책에서 다 나옵니다. 한 독회(讀會)에서 우리말로 번역해서 출간하고 싶다고 연락했더니, 6개월을 뜸을 들이고 나서 사양하겠다는 답신을 보내왔습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어쨌든 우리나라가 현세주의적인 풍조가 좀 강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설이든 영화든 판타지가 잘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런 성향은 저에게도 뚜렷해서 무협영화를 좋아해도 터무니없이 과장된 무술이 나오면 이내 외면하곤 했습니다. 과장에도 반드시 리얼리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이누야샤’가 그 ‘빗장 걸린 문’을 따고 내게 들어왔습니다. 어째서 그게 가능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터무니없는 과장이 용납되기 시작했습니다. 고작 칼 한 번 내려치는 동작에도 수 만 가지 변화가 있는 것처럼 빛과 색과 소리가 요란한 합주(合奏)를 연출해 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접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언제부턴가는 ‘저 정도로는 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염까지 들기 시작했습니다. 빛이 좀 더 하늘을 덮어야지, 땅도 좀 더 깊이 갈라지고, 소리는 왜 저리 일찍 그치고 마나, 저게 뭐야 요괴 치고는 너무 시시하게 죽는구만, 더 강하게, 더 자극적으로, 스토리든 장면이든 갈 때까지 양껏 밀어붙여주기를 원하고 있는 거였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본격적인 노화(老化)가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누야샤』를 모르시는 독자분도 계실 것 같아서 간단히 소개합니다. 『이누야샤』는 다카하시 루미코가 창작한 만화와 이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입니다. 1996년부터 《주간 소년 선데이》에 연재되었고, 2008년에 558화로 완결되었습니다. 제47회 소학관 만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일반적인 탐색영웅신화의 서사구조(숨겨진 보물찾기)에 현대 동화의 전형적 판타지 포맷 중 하나인 시간여행(시간의 문을 통과한 과거로의 여행)과 윤회적 인물설정을 가미하고, 무협적 요소인 각종 요괴 퇴치 서사(무자수행)를 나열한 전형적인 ‘야마토’식 무협-멜로 서사물입니다.
이누야샤의 성격을 보겠습니다. 그는 요괴와 인간 사이의 혼혈(초월적 인간)이며, ‘나쁜 남자’의 캐릭터를 일부 가지고 있으면서, 기본적으로는 ‘훈남(꽃미남)’이고, 능력 있는(불패의 무기 철쇄아의 소지자) ‘의리의 사나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캐릭터입니다. 거기다가, 일본인들의 무의식, 혹은 신화적 심성이 좋아하는(숭배하는) ‘개’와의 혈연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에게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숭배 대상이 적지 않게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코마이누’(こまいぬ, 狛犬)입니다. 사자 모양으로 된 개의 석상인데, 주로 신사(神社) 앞에 벽사(辟邪)를 위해 쌍으로 마주 보게 세워 놓습니다. 말하자면, 이누야샤는 코마이누의 현대적 부활인 셈입니다.

얼마 전 페북에서 ‘인지 잉여(cognitive surplus)’에 관한 연설을 하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연사인 클레이 셔키(Clay Shirky)의 주장에 따르면 ‘인지잉여’, 즉 여분의 사고능력(spare brainpower)을 통해 우리는 보다 더 낫고 협력적인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키피디아를 편집하고, 우샤히디에 포스트를 올리며, 고양이 짤방을 만드느라 바쁘다는 것은,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종의 ‘놀이 작업들’이라는 주장입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만드는 도깨비 이야기도 결국은 그가 말하는 ‘인지 잉여’에 속하는 것입니다. ‘인지 잉여’를 허락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창발적인 사유가 불가능합니다. 한 인간의 생애 주기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판타지가 서식하지 못하는 생의 공간은 늘 각박합니다. 그러니까, 넘치는 게 있고, 필요에 부응하지 않고 덧나 있는 게 있고, 이리저리 흔들릴 만큼 여유 공간이 있는 ‘삶의 잉여’가 없습니다. 저에게 ‘이누야샤’라는 그 개도깨비가 찾아온 것이 반가운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 ‘인지 잉여’가 그동안의 ‘각박했던 삶’을 밀어내고 좀 ‘노는 공간’을 내 생활에 설치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저도 이제 좀 놀멘놀멘 살아야겠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