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감언이설(甘言利說)③

은빛강 2012. 4. 17. 01:42

인문학 스프 - 時俗
감언이설(甘言利說)③ - 화이부동(和而不同)

나이 들어 부부가 각방을 쓴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재미있는 건 그 이유가 십중팔구는 코고는 소리 때문이라는 겁니다.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제가 코를 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난잡(?)하게. 아내가 말하고 딸아이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남녀 간에 부부로 평생을 살려면 의리가 있어야 된다고요. 사랑도, 정(情)도, 미련도, 연민도 아니라고요. 의리가 있어야 가족 간에도 ‘화이부동(和而不同)’이 가능하다고요. 특히 부부는 더 그렇다고요. 오래 같이 살면 서로 닮는다는데 사소한 불편을 핑계로 불화를 자초해서는 안된다고요. 어디까지나, 화(和)를 전제로 부동(不同)을 견뎌야 된다고요.... 각방을 면하려고 없는 ‘문자(文字)’가 총동원되어야 했습니다. 씁쓸합니다. 이참에 우리가 살면서 지켜야 될 최소한의 의리, 오륜(五倫)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오륜(五倫)의 핵심은 부자유친과 부부유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군신유의(君臣有義)나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과 같은 계율도 중요하지만, 앞선 그 두 가지 계율보다는 덜 각별하다는 느낌입니다. 군신유의나 장유유서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취급될 때가 많습니다. 붕우유신은 이(利)가 교우(交友)의 목적이 되어버린 지 오래인 우리 시대에서는 아예 ‘신화’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진정한 벗들은 페북에서밖에 찾을 수 없다는 말도 들립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더라도(우리끼리 하는 이야기니까) 지금 내게 가장 요긴한 존재가 내 마누라(내 서방)와 내 자식이니 불문곡직, 부자유친과 부부유별이 가장 중하다고 쳐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부자유친(父子有親)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혈육 간이든 세대 간이든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부자유친은 미래와의 제휴입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과거와의 화해고요.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제휴(연대)와 화해(용서) 없이는 존재의 연속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없습니다. 갈등은 언제나 새로운 제휴의 도화선이 될 뿐이지요. 그러므로 부자유친은 인간세(人間世)의 필수모티프(bound motif)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화이부동은 세대 간에서도 반드시 존중되어야 할 계율일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공적(公的) 아비’라는 말이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입니다. 부적 권위를 가지는 사회적인 제도나 이념들에 대한 갈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같이 국가, 사회적 차원에서의 부적 권위들이 - 식민지 경험, 동족상잔 경험, 군부 독재 치하 경험 등을 거치면서 - 불가피하게 실종․변질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들에게는 그것과의 화해(부자유친의 회복)가 언제나 화두가 됩니다. 훼손되거나 왜곡된 ‘공적 아비’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겠지요. 물론 ‘아비’ 책임이 크지요. 국권 상실 경험 후 100년, 동족상잔 경험 후 60년, 광주민주화 투쟁 후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로 살다간 그 시대의 ‘아비’들은 모두 아쉬운 부자유친을 남기고 이제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 역사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새 역사가 다가오는 뚜렷한 징후들이 포착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 된 자로서, ‘도적처럼’ 다가올 미래를 위해, 나 스스로 어떤 부자유친을 만들어 나가야 할지 크게 고민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어떤 ‘아비’가 되느냐가 앞으로의 또 수십 년을 결정하는 일이 될 것이니까요.
진정한 부자유친은 결국 얼마나 많은 ‘아들’을 가지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내 아들 하나만을 중하게 여기는 ‘아비’가 되어서는 진정한 부자유친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부부유별(夫婦有別)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부자유친이든 부부유별이든, 서로 상대(相對)가 되는 두 사람이 불화하지 말고 잘 지내라는 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다만 하나는 ‘친(親)’을 도모해 잘 지내고 다른 하나는 ‘별(別)’을 도모해 잘 지내라는 것만 다를 뿐이겠지요. 그렇다면, 다소 억지스런 질문이 되겠습니다만, 맨 처음 오륜을 강조했던 사람들은 둘 중의 어느 쪽에서 먼저 ‘잘 지내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버지 ․ 남편 쪽일까요, 아들 ․ 아내 쪽일까요. 그렇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특별한 강조가 없었더라도, 그때는 아들이나 아내가 먼저 잘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쪽이 꼭 ‘아랫것’이었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그런 발상이 당시의 소위 ‘체제적 발상’이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당근 아버지 ․ 남편 쪽이지요. 아비가 아들의 미래를 먼저 걱정해야 합니다. 남편이 알아서 아내의 입장을 고려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체제적 발상’입니다.
그래도 알 건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別)’의 내포 말입니다. 부부 간의 화이부동 말입니다. 서로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겠죠. 역할에 대한 존중과 이해, 인격에 대한, 헌신에 대한, 의리에 대한 신뢰와 감사가 두 사람 사이에는 존재해야 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말로는 거창하지만 사실은 별 것 아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묵묵히 모두 그렇게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우리 앞의 나이 든 부부들은 보통 다 그렇게 서로 이해하고 인정하며 평생 동안 상대를 긍휼히 여기며 살아온 분들입니다.
괜히 중언부언했습니다. 다 실천하고 있는 일상에 대해 따로 주석을 달려니 중언부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별반 공부도 되지 않았구요. 그래서 앞장의 ‘황금 풍뎅이’에 이어서,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아니마(anima), 아니무스(animus) 이야기로 급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아니마는 남성 속의 여성적 영혼이고 아니무스는 그 반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심리적으로는 양성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거지요. 중년 이후에는 평생 억압받아 온 내 안의 반대 성(性)이 몽니를 부립니다. 남자들은 잘디잘아지고 여자들은 목청껏 소리를 높입니다. 그걸 호르몬 분비 문제로만 이해하는 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모든 면에서 심리적인 요소와 내통(?)하고 있습니다. 지면 관계 상(집 사람이 절대 길게 쓰지 말라네요) 짧은 예화 하나만 들고 마치겠습니다. 어릴 때 가까운 친척 아주머니가 저희 집에 와서 신세 한탄을 크게 한 번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아저씨가 바람을 피우신 거지요. 작은 집에 쳐들어가서 한바탕 하고 오신 뒤인 것 같았는데, 그래도 분이 안 풀려서 울고불고 야단이 났더랬습니다. 그런데 어린 조카가 들어도 인상적이었던 대사가 한 마디 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물으셨겠지요. 어떤 여자더냐고. 말도 마라고. 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치더군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미친 놈이지. 그렇게 허우대 멀쩡한 놈이 눈깔이가 삐었지 그런 년 어디가 좋다고...”
말씀이신즉, 막상 대면해 보니 형편없이 축이 가는 몰골이었답니다. 체구도 작고 인물도 변변치 않은 여자였답니다. 도저히 자존심이 상해서 견디지를 못하겠더라는 거죠. 왜 그런 하찮고 볼품없는 여자를 좋아하는 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도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저씨는 기골도 장대하시고 인물도 좋으셨거든요. 나중에 알았습니다. 남자들이 밖에서 그 동안 억압(학대?)받던 자신의 아니마를 그런 방식으로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을요(최근의 ‘첫사랑 증후군’도 아마 그쪽에서의 혐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나이든 어머니들이 이승기나 송중기, 김수현 같은 꽃미남 배우를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이유도 같은 거겠지요(일본에서는 욘사마가 아니무스의 본색을 드러낸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만). 다만 남녀가 스타일상으로 좀 ‘별(別)’하긴 하지만요.
어쨌든, 아니마든 아니무스든, 내 안의 콤플렉스가 준동해서 오륜의 테두리를 벗어난 엉뚱한 선택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할 필요가 있는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각방’은 가급적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족 : 살다보면 ‘친(親)’할 때와 ‘별(別)’할 때를 잘 구별해서 행하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오륜의 나머지 것들, 의(義), 서(序), 신(信)도 한 가지겠습니다만 유독 친과 별이 더 합니다. 그만큼 그것들이 중(重)하다는 의미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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