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이굴위신(以屈爲伸)⑤

은빛강 2012. 4. 17. 01:46

인문학 스프-고전
이굴위신(以屈爲伸)⑤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코드(code), 오늘의 맥락(context)은 내일이 되면 어느새 오해와 편견을 낳는 흉물(凶物)이 됩니다. 우리 사회 안에서 세대간의 불화, 계층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두되고 있는 이 시점, 그러면서도 전조(前兆)로나마 어떤 민의(民意)의 용솟음(용트림?) 같은 것을 목도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그런 ‘속도감 있게 변화하는 의미작용’에 성심을 다해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그 변화의 방향이 제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나 느낌이 들 때는 더 그럴 것 같습니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이 그 작업을 통해 좀더 명료하게 확인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데 안 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허황된 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점복술(占卜術)에 대한 기대입니다. 점복에 대한 선호(選好)는 예나제나 변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최근에는 타로점이라는 게 나와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꽤나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심심풀이로 한다고 하지만 은근히 중독성이 있어서 한때 가게마다 문전성시를 이루곤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미래의 길흉화복을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엉터리 신념입니다. 그건 제가 속칭 점쟁이 골목에서 살아보았기 때문에 잘 아는 일입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점 골목 동네에서 선술집을 여신 적이 있습니다. 그 단골손님 중에 민씨 아저씨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아버지와 연세도 비슷하신 말동무였는데 세칭 ‘도사’ 분이셨지요. 그 동네에서 가장 멋지게 생기신 분이었습니다. 얼굴이 관옥처럼 붉고, 표정이 늘 잔잔한 호수처럼 맑은 아저씬데 전쟁 중에 다리 한쪽을 잃어 생계형 ‘도사’가 되신 분입니다. 그때 그 아저씨가 한 젊은이를 데려와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하시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제 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남의 일을 알 수 없다. 네가 공부를 배우겠다고 하니 말리지는 않겠지만, 남의 앞날을 알려고 애쓰지 말고 네 자신을 알기에나 힘써라. 그러다 보면 길이 보인다. 어쨌든 책에는 길이 없다.” 아마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정리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민씨 아저씨는 동네에서 가장 점잖은 분이니까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다른 아저씨나 할아버지들은 자기들끼리 모이면 대놓고 시쳇말로 ‘쌩을 까’셨습니다. 얼큰하게 취기가 돌면 낮에 있었던 무용담(?)도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재미있게 들려주곤 했습니다(자세한 것은 약하겠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저였기 때문에 평생 동안 점복을 믿지도 않았고 점집을 찾아다닌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언제부턴가 제가 점복술의 실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소가진설(小家珍說)⑦ - 대운(大運)이 있다면」 참조). 그뿐이 아닙니다. 얼떨결에 이미 운명론자가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팔자가 정해진 것이어서 달리 그것을 벗어날 방도가 없다라고 무심결에 믿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 스스로 예감한 것이나 예측했던 일들이 하나 없이 다 현실로 닥쳐왔다고 믿고 있었고, 내 인생은 마치 멜로드라마가 그런 것처럼, 주인공에게 닥친 가까운 앞날의 실패와 고통들이 결국 먼 미래의 성공과 보상으로 변환되어 오는 플롯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턱없는 낙관(樂觀)이 왜 생겼는지 저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중간 중간에, 집사람이 용하다는 집을 찾아가서 저의 운세를 보고온 사실은 있습니다). 저는 본래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전전긍긍, 전전반측, 오매불망, 노심초사하는 햄릿형 캐릭터가 제 성격이었습니다. 결코 낙관론자가 아니었습니다. 시간 약속이 있으면 꼭 10분이라도 먼저 나가 앉아 있어야 직성이 풀리고, 마감 날짜를 적어도 일주일은 앞당겨서 원고를 넘겨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었습니다. 원고 매수도 항상 넉넉하게 보내야 했습니다. 성적 처리나 (출장, 연수)결과 보고서 작성, 논문 투고도 항상 선두를 달렸습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들도 마찬가집니다. 약속도 대가(보상)도 없는 자발적인 글쓰기인데 꼭 무엇에 매인 자처럼 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의 그 턱없는 낙관의 정체를 의심케 하는 것입니다(아마 여러 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저를 찾아온 계기가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듭니다) 어쨌든, 제 스스로 생각해도 제가 조금 변한 것 같습니다. 특히 요즘 들어 별의 별 낙관적 예감이 많이 듭니다. 전에 같으면 망상증을 의심해 보기도 할 텐데 요즘은 그런 스캐닝도 별 재미가 없습니다. 어쩌면 백약이 무효, 이미 그럴 단계는 훌쩍 넘어선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페이스북에서 어떤 분이 『주역(周易)』을 펼치고 스스로 점괘를 한 번 뽑아보셨다는 글을 얼마 전에 올리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몇 년 전 모종의 출사표를 쓰면서 그런 식의 자충수(?)를 한 번(딱 한 번!) 두어 본 경험이 있었습니다(저의 경우가 그렇다는 겁니다. 자세한 내용은 약하겠습니다). 결과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너는 지금 나가면 죽는다. 건너지 마라”였습니다. 그걸 저는 “지금 건너지 않으면 죽는다”로 읽었습니다. 다른 의미는 한 구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갔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죽고’ 나서 보니 그 문의(文意)가 너무 뚜렷해서 글자가 책장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그걸 거꾸로 읽은 제가 제 스스로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게 인간인 모양입니다. 그때 그일 이후로는 절대로 주역 근처에 가지 않습니다. 이미 한 번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번 죽으니 점볼 일이 없어져서 편했습니다. 그러고는 그냥 덮어놓고 낙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제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니까 점을 보든 안 보든, 그리고 나가든 안 나가든, 모든 것이 팔자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소가진설(小家珍說)⑦ - 대운(大運)이 있다면」의 주된 취지도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게 현재 저의 ‘코드와 맥락’인 것 같습니다.
다산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중에도 200년 전 당대의 코드와 맥락에 대해 논하고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주역(周易)』이라는 책이 인격 수양의 한 지침으로 고려되지 않고 오로지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도구로만 사용되는 풍조를 나무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도적처럼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구구하고 구차한 해석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미 그것은 ‘해석’이나 ‘설명’의 대상은 아닌 듯싶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운세와 연관시킨 섣부른 ‘예측’은 절대 금물일 듯합니다. 다산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상을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바탕에는 ‘하늘을 섬기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이 마구 자신의 부귀영달에만 목적을 두고 점을 (감히!) 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다산의 목소리를 직접 한 번 접하는 것도, 자성의 차원에서, 그리 무용한 일은 아닐 듯싶습니다.

『주역(周易)』으로 말하더라도 요즘 사람은 하늘을 섬기지 않는데 어찌 감히 점을 칠 수 있겠습니까. 한선자(韓宣子)가 노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역상(易象)을 보고서, “주나라의 예(禮)가 노나라에 있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역전(易箋)』을 자세히 보면, 서주(西周)의 예법 가운데 환히 알 수 있는 것들이 부지기수인데, 지금 점치는 것이라 하여 그 예법마저 고찰하지 않는대서야 되겠습니까. 공자는 점치는 것 외에 별도로 단전(彖傳)과 대상전(大象傳)을 지었으니, 『주역』이 어찌 점치는 책일 뿐이겠습니까?
옛날에는 봉건제도를 썼으나 지금은 봉건제도를 쓰지 않고, 옛날에는 정전(井田)제도를 썼으나 지금은 정전제도를 쓰지 않고, 옛날에는 육형(肉刑)제도를 썼으나 지금은 육형제도를 쓰지 않으며, 옛날에는 순수(巡狩)를 하였으나 지금은 순수를 하지 않고, 옛날에는 제사 때 시동(尸童)을 세웠으나 지금은 시동을 세우지 않습니다. 점치는 일을 지금 세상에 다시 행하게 할 수 없는 것은 이런 몇 가지 일보다 더 어려운 게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갑자년(1804)부터 『주역』 공부에 전심하여 지금까지 10년이 되었지만 하루도 시초(蓍草)를 세어 괘(卦)를 만들어 어떤 일을 점쳐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만약 뜻을 얻는다면 조정에 아뢰어 점치는 일을 금하게 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복서는 옛날의 복서가 아니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비록 문왕(文王)이나 주공(周公)이 지금 세상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결코 점으로써 의심나는 일을 해결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이러한 뜻을 천명하여 따로 책 하나를 짓지는 아니하고 『주역』의 원리가 지나치게 밝혀졌다고 근심까지 하시는 것입니까?
무릇 하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감히 점을 치지 않는데 저는 지금 하늘을 섬긴다 하더라도 점을 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이런 뜻에 매우 엄격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주역』이란 주나라 사람들의 예법이 들어있는 것이어서 유자(儒者)라면 그 깊이 있는 말과 오묘한 뜻을 발휘하여 밝히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날 성인은 모든 깊이 있는 말과 오묘한 뜻에 대해 그 단서만 살짝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깨닫게 하였습니다. 만약 하나도 숨겨진 것이 없이 훤히 드러나 볼 수 있다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역전(易箋)』은 너무 자세하게 밝혀놓았으니 이 점에 대해서는 깊이 후회하는 바입니다. [정약용(박석무 편역),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둘째형님께 답합니다 2, 중에서]

중국 춘추시대 진나라의 대부(大夫)인 한기(韓起)로 ‘선자’는 그의 시호.
다산의 『주역사전(周易四箋)』.
『주역』의 편명.
옛날에 제사지낼 때 신위(神位) 대신으로 그 자리에 앉히던 어린아이.
톱풀. 엉거시과에 속하는 다년생풀. 고대에는 이 풀을 점칠 때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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