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이굴위신(以屈爲伸)③

은빛강 2012. 4. 17. 01:50

인문학 스프-고전
이굴위신(以屈爲伸)③ - 주워온 자식, 데려온 자식

논어(論語)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도 그렇지만, 거기서도 등장인물들을 한 명씩 보다보면 인간살이가 어디서고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부터 그렇다. 집나간 마누라가 죽었는데 아들이 그 슬픔을 표나게 드러내며 소리내어 울자 고함을 쳐서 못 울게 한다. 오죽했으면 여자가 자식을 두고 집을 다 나갔을까, 그 입장에서 그냥 모른 척해주면 어디 덧나나, 엄마 잃은 아들의 애도까지 막는 공자도 딱하다. 물론 ‘법도에 없는 일’이라고 했을 것이지만, 하여간 공자도 ‘주인 같은 주인’, ‘사람 같은 사람’ 제대로 한 번 못 만나고 한평생 팍팍하게, 주변만 맴돌며 살다간 사람이다. 그런 공자가 후일 문성왕...(文聖王)으로 추존되어 존숭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의 맥락은 그렇게 패자부활전의 장소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공자와 관련된 책에는 늘 안회(顔回)와 자로(子路)가 등장한다. 좌청룡 우백호다. 공자의 제자 중 가장 ‘사람 같은 사람’이 바로 이 두 사람이다. 그러니 자주 출연할 수밖에 없다. 공자의 가르침이 바로 그 ‘사람 같은 사람’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어에서는 안회가 프로타고니스트로, 본받아야 할 롤 모델로 주로 기용되고 자로는 상대적으로 악역, ‘넘버 쓰리’ 역을 주로 맡는다. 안회는 칭찬의 대상이고 자로는 타박의 대상이다. 그렇게 그들은 공자의 사상을 협주(協奏)한다.
공자는 안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질다, 회여. 밥 한 그릇에 국 한 사발, 그런 조악한 식사를 하며 남루한 뒷골목에 산다. 보통 사람들은 어쩌다 불평도 하련만 회는 오히려 가난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나와 이야기할 때에는 바보처럼 듣고만 있는데, 물러가서 행동하는 것을 보면, 내게서 들은 바를 그대로 옮기니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세상이 필요로 할 때면 도를 그대로 행하고 세상이 저버리면 조용히 도를 지키는 것은 오직 나와 그만이 할 수 있다.”
안회는 29세에 머리털이 다 희어졌고, 젊어서 세상을 떠났는데(家語에는 32세 卒), 이때 공자는 소리내어 울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내가 회를 제자로 삼은 뒤부터는 다른 제자들이 더욱 나와 다정해질 수 있었는데…….”
제자들에 대한 기대를 안회가 다 충족시켜주니 화낼 일이 없었다는 거였다. 그 뒤 노애공(魯哀公)이, 제자들 중에 누가 학문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안회입니다. 그는 학문을 좋아했으며, 자기 감정에 치우쳐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일이 없었고,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명이 짧아 지금은 죽고 없습니다.”

나는 그들을 ‘주워온 자식’과 ‘데려온 자식’으로 대비시킨다. 안회는 ‘주워온 자식(업둥이, 입양아)’이고 자로는 밖에서 낳아서 ‘데려온 자식(전실 소생, 사생아)’이라는 식이다. 마르트 로베르가 ‘낭만주의/사실주의’ 분류 때 사용한 개념이다. 안회가 낭만주의의 표상이라면 자로는 사실주의의 표상이다. (마르트 로베르(Marthe Robert)는 자신의 저서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에서 프로이트의 「신경증 환자의 가족소설(판타지)」의 중핵적인 모티프-나는 업둥이나 사생아일 것이다-를 사용한 이분법적 도식을 제시한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할 때 현재 자신의 삶을 현실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데, 그 ‘거짓말’의 원형이 두 가지 타입을 보인다고 하였다. ‘주워온 자식/낭만주의’와 ‘데려온 자식/사실주의’가 그것이다.)
본디 입양아에게는 부모의 핏줄 욕심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런 관계로 부모는 비교적 평정심으로 아이를 대한다. 투사가 없으니 그 아이는 그냥 귀엽다. 조금만 잘 하면 부모들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다. 핏줄 쪽에서의 과장된 기대나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생아는 그렇지 않다. 부모와의 핏줄 인연에 한 쪽으로 흠집이 나 있어 자꾸 꼬인다. 투사와 보상심리와 피해의식이 이리저리 피드백(?) 되면서 과도한 심리 에너지가 발생한다. 어떤 일에서나 공연히 미워 보일 때가 많다. 잘 할 때보다 못할 때가 자주 눈에 띤다. 그래서 곧잘 타박의 대상이 된다.
『논어』를 보면 두 사람의 운명이 딱 그렇다. 안회는 하는 일마다 칭찬이고(나보다 낫다!) 자로는 하는 일마다 꾸지람이다(늘 2% 부족하다!). 자로는 그래서 현실의 대변자고, 천덕꾸러기다. 적어도 안회와 대비될 때는 그렇다. 그는 언제나 이상(理想)적 인격인 안회에게, ‘주워온 자식’인 안회에게, 눌려 지내고, 미운 오리새끼처럼, ‘데려온 자식’ 취급으로, 좌중들 앞에서 무안을 당한다. 한번은 스승이 안회를 지나치게 두둔하여 안하무인, 다른 제자들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자 자로가 외통수 질문을 낸다. 자기에게만 야박한 스승에게 ‘장을 부른다.’ 선생이 도저히 다른 대답을 못할 질문을 던져 ‘그 부분에서는 네가 최고다’라는 말을 들으려 한다.

“선생님께서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출정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당대의 일급 무자(武者)인 자기를 두고 누구와 함께 하겠냐는 거였다. 사실, 자로가 공자의 제자가 된 이후부터 저잣거리의 건달들이 공자에게 시비거는 일이 아주 없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거기서도 자로를 치켜세워주지 않았다. 오히려 또 무안을 줬다.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으려 하고, 맨발로 배 없이 황하를 건너려다 죽어도, 제 잘못을 모르고 후회하지 않는 자와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일에 임해 두려워하고 꾀를 잘 내어 일을 성취하는 자와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끝까지 자로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공자가 안회만을 사랑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자로에 대한 사랑도 끔찍했다. 다만 그렇게, 각자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두 제자를 가르쳤을 뿐이다. 자로와 안회는 스승보다 일찍 죽었던 제자들이다. 그들의 죽음을 두고 스승이 보여준 애도는 참으로 절절했다. 하늘이 자신을 버리는 것으로 여겼고, 아예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죽음에 임하여서도 비뚤어진 갓끈을 고쳐 매는 예교문화의 화신’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자로의 죽음은 공자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었다. 늘 꾸지람으로 대하던 제자였지만 스승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스승은 제자를 그렇게 두 가지 방법으로 다룬다. 자로처럼 대하거나 안회처럼 대한다. 꾸짖어 가르치거나 부추겨 가르친다. 당연히 인지상정,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한, 속이 다 읽히고 실수가 잦은, 자로 같은 제자가 스승으로서는 내심 편하고 사랑스러울 때가 많다. 다만, 자신이 걸어온 실패의 전철을 답습할까 저어되고 행여 그가 넘칠까 두려워 사랑을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 공자도 ‘데려온 자식’ 자로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했다. 미우나 고우나, 불쌍한, 어쨌든 자기 핏줄(위정지도의 추종자)이었기 때문이다.

공자에게 ‘위정지도(爲政之道)’의 실천을 넘어선 ‘안빈낙도(安貧樂道)’가 하나의 주의(主義)가 되는 것은 그의 나이가 근 60세에 이르렀을 때였다. 주유천하가 하나 남김없이 다 실패로 귀결된 뒤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안빈낙도뿐이었다. 그 문맥에서 ‘60번도 넘게 새롭게 자신을 바꾼’ 거백옥(蘧伯玉)(위나라의 대부. 위나라 영공의 책사 안합(顔闔)에게 당랑지부(螳螂之斧)의 비유를 들어 섣불리 자기를 주장하다가 화를 입게 되는 우를 범하지 말 것을 충고함.)에 대한 강조가 등장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거백옥을 닮자고 한 것은 이미 속세에서 현달하겠다는 뜻을 거둔 뒤였다. 안회가 스승과 행장(行藏)을 같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적통으로 지목되는 것도 그 무렵이었다. 공자는 예순아홉 살에 겨우 고국의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는데,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아니하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숨을 것이니라”(「泰伯」)라는 평소의 행장(行藏) 지론을 그 때서야 비로소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욕심 없이 키워온 ‘주워온 자식’(이미 죽은)이 더할 나위 없이 이뻐 보일 때가 바로 그 때였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아이는 나이도 어렸는데(안회의 아버지도 공자의 제자였다) 공자 자신도 못 지킬 안빈낙도의 경지를 몸소 실천했던 것이었으니 칭찬하고 또 칭찬해서 그의 경지를 본보기로 붙들어 매어둘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 내심, 그러한 실천이 인간에게 가능한 것인지 확신이 없었던 공자에게는 안회야말로 니체가 말한 ‘황금의 언어’였던 것이다.

이 두 사람, 서른 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났던 공자의 두 제자, 자로와 안회가 스승에게 ‘사람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이 항심(恒心)을 지니고 스승을 견디고 자기를 지켰기 때문이었다. 안회는 스승의 기대를 항상 넘치게 실천해내었고 자로는 끝까지, 죽음에 임하여서도 스승의 타박을 인내했다. 그들은 변치 않는 마음으로 제자의 이름값을 제대로 치른 인물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도리를 밝히는 공자의 사상을 설명해 낸다. 안회에게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안회만의 삶(설명)이, 자로에게는 자로만이 가능한 삶(설명)이 있다. 그들은 그렇게,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고 스승을 견딘 자신의 삶으로, 참된 인간을 규정한다. 논어에서는 공자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그들만이 ‘인간을 규정하는 인간’이다. 돈 많고 재주가 있던, 그래서 실제적인 공자 학단(學壇)의 지주(支柱)였던 자공마저도 감히 넘볼 수 없었던, ‘사람의 도리’를 몸으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삶으로 인간을 규정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자들이었기에 자공처럼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앞세워 스승을 능가해 보려는 용심을 결코 품지 않는다. 스승은 공자 한 사람만으로도 족했다. 위대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는 항상 제자들의 몫이 크다는 것을 그들은 보여준 것이다. 안회(顔回)는 너무 완벽하게 이상화되어있고, 자로(子路)는 주연이 아니라 항상 조연의 역할에 머물고 있다며, 자공(子貢)을 『논어(論語)』의 실제적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그저 희언(戱言)에 불과하다. 자공은 그저 똑똑하고 능력있는 한 사람의 인간, 한 명의 제자였을 뿐이다. 자로와 안회처럼, 스스로의 이름으로 사람의 도리가 무엇이고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그야말로 ‘위대한 스승의 제자’, ‘공자의 남자’, ‘사람 같은 사람’의 반열에는 결코 오르지 못할 사람이었던 것이다.

'문학의 길잡이 > 양선규-문학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굴위신(以屈爲伸)①  (0) 2012.04.17
이굴위신(以屈爲伸)②   (0) 2012.04.17
이굴위신(以屈爲伸)④  (0) 2012.04.17
이굴위신(以屈爲伸)⑤  (0) 2012.04.17
감언이설(甘言利說)①  (0) 2012.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