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이굴위신(以屈爲伸)①

은빛강 2012. 4. 17. 01:53

<인문학 스프-고전> 이굴위신(以屈爲伸)① - 협객행

작성: 양선규 2012년 3월 20일 화요일 오전 10:31 ·

인문학 스프-고전

이굴위신(以屈爲伸)① - 협객행

'중국의 은자들'(이나미 리츠코)을 읽다가 말았다. 책상 위에 올린 지 두어 시간 만에 내렸다. 주인공들의 삶이 공명(共鳴)이 되지 않았다. 초독(初讀) 때도 그랬던 것 같다. 몰입을 이끌 신기(新奇)가 많이 부족했다. 너무 평이한 기술이었다. 여러 명의 역사적 인물들을 골라서 그들의 가계(家系)를 섭렵하고 알려진 일화를 나열하는 단순소박한 기술체계로 독자들의 주의를 끌려고 했던 저자의 용기가 오히려 가상했다. 그쪽 출판 풍토는 그런 용기를 용납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경우로 본다면, 작가가 자기 몫을 다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독자의 공고한 불신의 장벽을 무너뜨릴 강력한 이야기의 화력(火力)도 없이 출판을 요구하다가는 미친놈 소리 듣기가 십상인 것이 우리 출판 풍토다. 은자(隱者)는 본디 숨어 지내는 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기기가 어렵다. 이야기는 그를 동경하는 타자(他者)들이 만든다. 작가는 대표적인 타자다. 타자들의 욕망을 대리 표현해 주는 것이 작가다. 은자의 이름을 빌려 다른 이야기거리를 많이 가져와야 할 건데 그러지를 못했다. 빌려 올 게 없으면 자기 이야기라도 족히 섞어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고작해야 주인공들이 은자가 된 이유나 설명하는 것으로는 ‘책’에 값하는 내용을 가질 수 없는 법이다. 그 안에서는 참조할 만한 내용을 찾지 못했다. 그 대신 페이스북에서 댓글을 달기 위해 뽑았던 『협객의 나라 중국』(강효백의 중국역사인물기행)을 읽었다. 난세에는 협객의 활약이 요구되는 법, 요즘과 같은 군웅할거(群雄割據), 천하쟁패(天下爭覇)의 시절에는 행장(行藏)의 이치를 살피는 것도 전혀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두 책에는 비슷한 내용도 꽤 있다. 시선(詩仙)이자 시협(詩俠)이었던 이백 같은 이는 양쪽에서 다 포착되는 인물이다. 그의 시 한 편을 옮긴다. 그 유명한 ‘협객행’이다. 장자의 ‘설검(說劍)’과 많이 겹치는 시다. 조나라 협객의 행색이나 ‘열 걸음에 한 사람 죽여도 천리에 자취조차 없어라(十步殺一人 千里不留行)’는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나머지 인명이나 사건들도 모두 사기 등 전장(典章) 고사(故事)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협객행(俠客行)

조나라 협객 거친 갓끈 늘어뜨리고

오나라 검은 서릿발 같은 빛을 발한다

은안장 빛나는 백마

유성처럼 바람 가른다

열 걸음에 한 사람 죽여도

천리에 자취조차 없어라

일 끝내고 옷을 털어

몸과 이름 깊이 숨긴다

한가히 신릉 지나 술 마시며

검 풀어 무릎에 걸쳐 놓는다

주해(朱亥)와 더불어 구운 고기 먹고

후영에게 잔을 권한다

술 석 잔에 좋다 하고

오악(五岳) 뒤집는 일조차

가벼이 여기더라

술에 취하니

의기는 무지개처럼 뻗치노라

조나라 구하러 금철퇴 휘두르니

한단이 먼저 놀랐다

천추의 두 장사가

대량성을 빛냈으니

협객은 죽어도 기개는 향기로워

천하영웅이 부끄럽지 않아라

그 누가 천녹각에 파묻혀

백발이 다 되도록 태현경을 지으리

협객행이 혈혈단신의 독행도(獨行道)를 버리고 무리를 지어 업(業)을 이루는 단계로 정치화되는 시초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난세, 즉 군웅할거, 천하쟁패의 시대상에 있다. 그 결과로 초래된 것이 또 한나라의 건국이다. 한고조 유방(劉邦)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호협(豪俠)이었다. 속된 말로는 왕건달이다. 진시황 정이나 항우 같은 이들은 왕족이거나 태생 귀족이었으므로 애초부터 호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나라의 건국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서민(민중) 왕조의 성립이라는 의미를 띤다고도 볼 수 있다.

“한나라는 항우(項羽)와의 최후의 한판승부에서 승리한 호협, 유방(劉邦)이 세웠다. 따라서 한나라에 이르면 협객의 무대는 개인플레이의 유협(遊俠) 중심에서 호협이 유협을 조직하여 리드하는 호협 중심의 무대로 바뀐다. 진나라 말, 천하가 다시 어려워지자 의협심으로 온몸이 가득찬 호협이 많은 유협의 무리를 장악하여 기꺼이 죽음으로 돌진하도록 한다. 호협은 생업도 없이 부랑하는 유협들을 규합하여 그들의 의식(衣食)을 해결하고, 법을 어기면서라도 그들의 위난을 구제해주어야 한다. 유협은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호협이 하는 일에 생명을 건다. 그러나 그들 사이를 묶어두는 줄은 단순히 주고받는 거래가 아니다. 여하한 지배관계도 재력이나 권력만으로 유지되는 법이 아니다. 지배당하는 자의 자발적인 충성심을 유도하고 또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망각케 하는 무엇인가가 개재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협객의 나라 중국』(강효백의 중국역사인물기행)

호협이 유협들을 규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사이에 세칭 ‘의리(義理)’라는 존재론적 규범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협객행’이나 ‘의리’에 대한 관심과 집착이 어떤 식으로든 분열적인 인간 정신의 치유와 성장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사실이다. 꼭 의리담론이 아니더라도, 어떤 플롯(plot)이든 인간은 가져야 한다. 자기 안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은 결국 이슬처럼 사라진다. 자신뿐만 아니라,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플롯을 가져야 재미가 있는 이치처럼, 내적 규범(플롯) 없는 인생은 누구에게도 읽혀지지 않는다. 호협들이 민초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민초들의 플롯을 만족시키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호협이 나라를 세우는 패턴(플롯)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삼국지형이고 또 하나는 초한지형이다. 전자는 한황실의 부활이라는 유전된 카리스마에 의지하여 보다 안정적인 느낌으로 세계의 갱신을 도모하자는 선동이고 후자는 ‘왕후장상의 씨가 다로 있나’라고 충동해서 전에 없던, 민초들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자는 선동이다. 난세를 종결시킬 이야기가 삼국지로 갈지 초한지로 갈지는 전적으로 그들 호협들이 쓰는 ‘의리담론’의 스토리가 얼마나 짜임새가 있고 감동적인가에 달려 있다. 그들 이야기의 결말이 가르치듯, 결국은 무엇이 ‘분열’을 막고 ‘통합’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승리한다. 의리담론이 ‘분열’에 대항하는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안팎으로 악전고투, 충(忠)과 성(誠)에 끝까지 매진한 우리의 ‘성웅 이순신’이나 주군에 대한 의리를 집단적 보복과 죽음으로 실천한 일본의 ‘주신구라(忠臣藏)’가 지금도 여전히 ‘불멸(不滅)’인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성웅 이순신’은 여러 가지 경로로 많이 알려져 있으니 여기서는 ‘쥬신구라’ 이야기를 통해 일본 쪽 ‘협객행’이 어떤 모양인지 한 번 살펴 보자.

1702년경, 도쿠까와 막부의 전성기 때 일이다. 도쿄의 쇼군(將軍)은 휘하의 두 영주를 선발해 교토의 황궁에서 온 대신을 접대하기로 했다. 이들은 궁정 예절에 대해 아는 바가 적었으므로 한 대신(기라)에게 예법에 대한 조언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수업료로 작은 선물을 마련하였는데, 정작 기라는 그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우연히 그의 불만을 안 한 영주는 곧 황금 상자를 보내 호감을 사는 데 성공했으나 한 영주(아사노 다쿠미노가미)는 그것을 모른 채 그에게 멸시를 받게 되었다.

아사노는 격해지려는 자신을 계속해 자제했다. 하지만 기라의 따돌림은 계속되었다. 기라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사노가 궁정 의례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느리다고 험담을 한 후, 그를 제외시키고 수업을 진행하기 일쑤였다. 아사노는 이런 모욕에 대해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명예를 지켜야 하는 엄격한 일본 무사의 규율에 따르면 이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기라의 죽음뿐이었다.

결국 아사노는 쇼군의 앞에서 기라에게 검을 뽑아 들었으나 살인은 미수에 그쳤다. 이러한 무례에 대한 처벌로 할복자살이 명해졌다. 그는 변명 없이 법과 전통에 따라 할복자살을 하였다.

아사노 영주는 휘하에 46명의 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주군이 사망함으로써 그들은 졸지에 로닌(浪人)이 되었다. 그들은 이에 분개해서, 주군을 모욕한 탐욕스런 기라 영주에게 복수를 하기로 맹세하고 치밀한 계획을 짠다. 쇼군과 다른 영주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알아차리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을 염려한 그들은 1년 동안 완전히 각자 서로를 찾지 않으며 지냈다. 세상을 완전히 등진 것처럼 행동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었으며, 의를 존중하는 한 무사는 그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세상의 평가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복수는 사건이 일어난 지 정확히 1년이 지난 날 밤에 이루어졌다. 1703년 12월 14일, 46명의 로닌들은 밤을 틈타 은밀하게, 방심하고 무방비 상태였던 기라 영주의 집을 급습한다. 땅에 쌓인 눈 때문에 그들의 움직임이 둔해져 결국 발각되고 집안은 온통 난장판이 되고 만다. 격렬한 전투가 끝났을 때 기라 영주 측은 영주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모두 살해당해 있었다. 벽장 뒤에 숨어 있다 발각된 기라는 할복을 강요당하였지만 이를 거부하고, 구라노스케라는 무사가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벤다. 잘려진 기라의 목은 센가쿠지 사원의 마당에 있는 아사노 영주의 무덤으로 옮겨져 그 앞에 놓인다. 복수는 종료되었고, 무사들은 모두 할복자살한다. 뒤늦게 이를 안 앞의 그 ‘의를 존중하는 무사’ 역시 자신의 불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할복자살한다.

주군 옆에 안장된 그들 47인의 무사는 그렇게 해서 ‘불멸(不滅)’이 되었다. 지금도 도쿄에서는 이들의 ‘의리’를 기리기 위해 매년 12월 14일을 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무도의 전설과 신화』, 98-101 쪽 참조]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도, 난세를 이끄는 호협(豪俠)들의 ‘협객행’은 여전하다. 그들 주변을 기웃거리는 유협들의 행색도 변함이 없다. 예나제나 힘없고 불쌍한 것은 민(民)이다. 대의도 명분도 실리도 없는데도 그들의 힘겨루기에 목숨을 잃는 졸(卒)로 동원된다. 그게 민초들의 숙명이다. 그러나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 주인은 역시 민이다. 공연히, 초한지나 삼국지 에서처럼, 그들 호협들의 의리 경쟁에 때 없이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결국 이야기를 선택하는 것은 민(民)이다. 어쩔 수 없이 세상은 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쪽으로 흘러간다. 삼국지 이야기로 갈지, 초한지 이야기로 갈지, 민초들의 플롯이 호협들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 그게 역사다.

'문학의 길잡이 > 양선규-문학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경의 기억㊽ - 옛우물  (0) 2012.09.15
인문학 스프-패러디  (0) 2012.07.10
이굴위신(以屈爲伸)②   (0) 2012.04.17
이굴위신(以屈爲伸)③   (0) 2012.04.17
이굴위신(以屈爲伸)④  (0) 2012.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