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감언이설(甘言利說)①

은빛강 2012. 4. 17. 01:44

인문학 스프 - 時俗
감언이설(甘言利說)① - 어린 왕자

나는 어린 왕자가 철새들의 이동을 이용해서 별을 떠나왔으리라고 생각한다. 길을 떠나던 날 아침, 그는 자기 별을 깨끗이 청소해 놓았다. 불을 뿜는 화산을 정성껏 쑤셔서 청소했다. 어린 왕자의 별에는 활화산이 두 개 있었는데 그것은 아침식사를 데우는 데 매우 편리했다. 그는 꺼진 화산도 하나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꺼진 화산도 청소해 주었다. 화산들은 청소만 잘해주면 폭발하지 않고 조용히 규칙적으로 불을 뿜는다. 화산의 폭발이란 굴뚝의 불과 같은 것이다. 물론 지구에 사는 우리는 너무도 작아 우리의 화산을 청소해 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화산으로 인해 많은 곤란을 당하는 ...것이다.[쌩떽쥐베리, 『어린 왕자』]

『어린 왕자』의 매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어린 왕자’는 이제 보통 명사로 받아들여집니다. 현실의 은유, 혹은 전복(顚覆)으로서의 『어린 왕자』는 일상(日常)의 공간에 유폐된 각박한 인정(人情)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습니다. 위로도 되고 반성도 됩니다. “내 비밀은 이런 거야... 매우 간단한 거지.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야”, “나를 길들여 줘. 가령...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사막은 아름다워...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와 같은 대사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것들과 처음 마주쳤을 때의 경이로움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린 왕자』가 주는 감흥이 그런 주옥같은 몇 마디의 아포리즘에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어린 왕자’는 우리의 ‘순수 자아’를 표상합니다. 그는 모험심이 넘치는 판타지 동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가 잊고 살아온 순수 자아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동화가 아닙니다. ‘어린 왕자’는 ‘해리 포터’가 아닙니다. 그가 숙명적으로 대적해야할 절대악도 없고, 동료들과의 애증어린 사회적 관계도 없습니다. 부모도 없고 스승도 없습니다. 그는 자연과 마주하거나 ‘일상에 유폐된 어른의 어떤 속성’에 맞설 뿐입니다. 이미 시작부터 그는 어른과 아이,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등장합니다. 오늘날의 많은 판타지 작가들의 관심사는 (어떤 형태든지) 초자연적인 것과의 만남이 주인공을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 작가들에게 마술이란 특별한 선명성과 예리함을 가지고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도 ‘어린 왕자’는 동화의 주인공 되기를 극구 사양합니다. 그는 변하는 인물(미숙한 자아)이 아닙니다. ‘모험’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가 보여주는 모든 것들은, ‘통찰’ 혹은 ‘깨달음’의 차원에 속해 있는 것들입니다. 근래 판타지에서의 마술적 모험들이 언제나 아이덴티티를 찾아가는 탐색 도정으로 묘사되었던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것입니다. 『어린 왕자』를 동화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어린 왕자』는 어른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린 왕자』가 매혹적인 것은 또 있습니다. 현실의 은유이거나 전복인 공간을 창조하고 있지만, 서사의 축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환유적 상상으로 옮겨갑니다. 유사성이나 동일성의 원리로 화제를 가져와서는 어느 순간 인접성의 원리로 이야기를 확장시킵니다. 파블라(사건의 연쇄)가 선택되고 배열되는 것이 아주 발랄합니다. 인용된 부분을 봐도 그걸 알 수 있습니다. “철새들의 이동을 이용해서 별을 떠나왔으리라”고 추측하는 부분이나 ‘화산’을 마치 ‘화덕’처럼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은유적 상상을, 나중에 ‘지구의 화산’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환유적 상상을 구사합니다. 원인-결과로만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물이나 사건으로 슬그머니, 번지듯이, 이야기가 옮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이동’이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이 기교라고 보기에는 그 이음매가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모든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동력으로서의 인간애입니다. 그 동력에 힘입어 ‘살아있는’ 환유적 연상이 활기차게 가동됩니다. 『어린 왕자』가 현실의 합리(合理)나 구속(拘束)을 뛰어넘어 좌충우돌,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환유적 연상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왕자』는 사랑입니다.

은유와 환유가 수사법 이상의 개념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합니다. 그것은 사고의 틀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주어진 틀 안에서, 그것이 요구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틀을 벗어난 사유는 천재(天才)나 분열(分裂)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얼마 전, 중학생들을 상대로 통일에 대해서 생각을 물었다고 합니다. 많은 아이들이 통일이 싫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 호주머니를 털어서 북한을 도와야 할 것 아니냐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전해 들으면서 그런 아이들은 아마 ‘환유적 상상력’에는 거의 문맹 수준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했습니다. 물론 무슨 근거가 있어서 한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죽은 은유의 사회’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환유는커녕, 은유도 ‘죽은 은유’밖에 모르는 아이들입니다. 그런 말은 교육받은 자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니라는 걸 아이들은 배우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우리의 ‘어린 왕자’들이 이 모양이니, 우리 교육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말 걱정입니다. 『어린 왕자』 책 한 권보다도 못한 일국의 교육입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서 재미나는 걸 하나 봤습니다. 신문에 정기적으로 연재되는 칼럼에서였습니다. 제목부터 선정(선동)적입니다. ‘쌍우사족(雙羽四足)’이 누구인가? 그 표제 아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점복술(占卜術)이었습니다. 저도 얼마 전 페북에서 ‘최도사 이야기’를 통해 사문난적 혹세무민(斯文亂賊 惑世誣民)의 우(愚, 죄는 아님)를 범한 일이 있었지만, 이 경우는 좀 심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점복술은 그것이 아무리 신통해도 ‘상수도 문화’를 자처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항상 그림자(shadow) 신세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퍼소나(persona)로 올라오면 이미 우리 사회의 철학과 교양은 그 수명을 다한 것입니다. 그것을 조간신문과 같은 자칭 ‘상수도 문화’에서 적절한 정수 장치(가면)도 없이 바로 노출시킨다는 것이 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대운이 있다면’에서 그랬던 것처럼, 점복을 말할 때는 항상 ‘믿거나 말거나’를 전제하고, 어조(語調, tone)상 농짓거리 태도를 반드시 유지하면서, 조심조심 에둘러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마땅했습니다. 결말도 반드시 경세제민(經世濟民)이나 인지상정(人之常情)의 영역으로 적절히 옮겨서 교훈적으로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제 흥에 겨워 점복의 영험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금물입니다. 그건 혹세무민입니다. 그런 딜레탕티즘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그것이 글쓰는 자들이 반드시 준수해야 할 업무 지침이고,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일단 그 내용부터 한 번 살피겠습니다.

당나라 때 만들어진 예언서로 알려진 추배도(推背圖)에는 60개 항목의 예언이 그림과 함께 수록되어 있고, 55개 항목의 예언이 그대로 들어맞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제45장의 ‘유객서래 지동이지 수화목금 세차대치(有客西來 至東而止 水火木金 洗此大恥 : 서쪽에서 온 손님이 동쪽에서 그치면 수화목금으로 대치욕을 씻어준다)’ 대목은 일본의 2011년 대지진과 핵발전소 폭발을 예언한 대목이라고 한다.
그 다음의 제 46장이 특히 흥미롭다. 그 요점은 ‘쌍우사족(雙羽四足)이 나타나면 주변 국가들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러 오고(四夷來朝之兆), 일대의 치세가 된다(一大治世)’는 내용이다. 모택동이 한고조 유방에 비유된다면, 이 ‘쌍우사족’은 한무제 시대에 해당될 거라고 본다. 그렇다면 ‘쌍우사족’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시진핑(習近平)이 무대에 등장하면서 쌍우(雙羽)는 ‘시(習)’를 가리킨다고 대강 짐작하고 있다. 사족(四足)은? 충칭시 서기이면서 ‘범죄와의 전쟁’으로 스타가 된 보시라이(薄熙來)가 아닌가 했다. ‘시(熙)’의 점 4개를 사족으로 본 셈이다. 그런데 보시라이의 오른팔인 충칭시 부시장 왕리쥔(王立軍)이 미(美) 영사관으로 망명을 시도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과연 보시라이는 어떻게 될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조용헌, ‘쌍우사족(雙羽四足)’이 누구인가?(조선일보)]

주지의 사실이지만, 현존하는 모든 예언서라는 것들은 반드시 ‘불완전 한 것’의 형태를 지닙니다. 어법적으로 보면, 브로카 실어증이나 베르니케 실어증의 형태를 지닙니다. 정감록의 감결(鑑訣)도 그렇고 상기 추배도라는 것도 그렇다. 서로 은유적이든 환유적이든, 일관성 없이 연결된 단어들이 무의미하게 나열될 때가 많습니다. 문맥 형성을 방해하는 비분절음 수준의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실제로 그것을 기재한 사람들이 ‘언어의 병’을 앓고 있었다고도 유추되고 있습니다. 그 비슷한 사례인 작가들의 고질병을 연구한 학자들의 증언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 내린 사람’들의 발화 능력이나 특징도 그러합니다. 그것을 ‘예언의 능력’을 지닌 주술(呪術)로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맥락을 주무르는 해석자들의 몫입니다.
해석자들이 의미를 창출해 내는 맥락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해석학적 규약은 두 갭니다. 하나는 의미론적인 해석(은유적 유추)이고 다른 하나는 구문론적인 해석(환유적 유추)입니다. 그것들을 ‘직관’의 수레(언어 자체가 수레입니다)에 태워 사방 팔달로 운용합니다. 이 해석의 수레를 사용하는 방법도 수준에 따라 다릅니다. 해석학의 고단자(高段者)들은 보통 의미론으로 일이관지 합니다. 이때는 은유적 해석이 주도합니다. 가급적이면 파자(破字)를 이용한 구문론적 해석 같은 것은 행하지 않습니다.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견강부회가 될 공산이 크기 때문입니다. 환유적 해석은 가급적 자제하고, 한두 단계 비약을 더 하더라도 우직하게 의미론적으로 갑니다. 비약(직관)을 통해서 의미의 연결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고수입니다. 고단자들이 의미론적 해석을 선호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기호학적인 관점(퀴로드)에서 볼 때, 본디 점복술은 논리적 코드에 귀속됩니다. 예절론(이를테면 유교의 삼강오륜)이 사회적 코드에, 종교적 신념(이를테면 신약성서의 부활)이 심미적 코드에 각각 귀속되는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점복술 자체의 생성원리이기도 한 해석행위의 논리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관록있는 해석자는 반드시 일관성 있게 의미론적 해석을 유지합니다. 하급자들은 그런 것을 고려할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텍스트를 재구성할만한 자기 콘텍스트가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도때도 없이 그 둘을 마구 섞어서 사용합니다.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대로 갖다 붙입니다. 인과성도 논리성도 없는 파자(破字)를 서슴지 않습니다.
위의 인용을 두고 말하자면, 45장의 예언을 ‘일본의 2011 대지진과 핵발전소 폭발’로 본 것은 의미론적으로(은유로) 해석한 것이고, 46장을 ‘시진핑과 보시라이’와 관련된 것으로 본 것은 구문론적으로(환유로) 해석한 것입니다. 46장의 해석도 의미론적으로 나아가면 사람 이름과는 전혀 관계없는 풀이가 나옵니다. ‘쌍우사족’은 신출귀몰의 능력을 지닌 영웅이나 문명의 등장, 혹은 획기적인 국운의 상승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문맥상 사람이 아닌 편이 더 자연스럽다. 보통의 새(鳥類)는 날개 두 개에 발 두 개인데, ‘두 개의 날개에 네 발인 것’이 등장한다는 것은 어떤 특별함이, 신묘(神妙)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괄목할 만한 과학의 발달일 수도 있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중국의 획기적인 경제발전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쌍우(雙羽)를 습(習)으로 보고 사족(四足)을 시(熙)로 보는 것(하단의 불 ‘화’변이 점 네 개)은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해 보입니다. 한자가 본디 회의, 상형문자라서, 형상적으로는 우선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사실, 독자들을 지나치게 낮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는 복채와 그 격이 맞지 않습니다. 부득이 파자를 사용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구문론과 의미론이 또 분별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쌍우사족’은 중국이 앞으로 고도성장의 미래를 가진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쌍우(雙羽)는 겹겹이 날아오르는 것으로, 사족의 사(四)는 그저 점 네 개라고 보아서, 그 숫자만 챙겨서, 화제가 되고 있는 사람의 이름 아무데서나 불화(火)변을 찾아 그것에 그냥 갖다 붙이기보다는, 그 불화(火) 변의 의미를 살펴 차라리 근대 기계문명(화력문명)의 발달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석해 주는 것이 점복술의 의미와 가치를 보전하는 길일 것 같습니다. 은유나 환유를 떠나서도, 그래야 ‘불완전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완전하게 만드는 행위, 이른바 ‘문화’로서의 점복술이지 싶습니다. 『어린 왕자』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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