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날 그 어느 유년에
아버지는 우리 육남매를 긴 나무 의자에 앉혀 두고
연탄난로 위에 가래떡을 구워 주셨다
엄한 아버지상에서 지금 생각해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러한 면모를 가끔 회상 해 본다.
내 모친은 조부모님과 아버지 덕에 외출을 모르고 살아 왔다.
하교 길 집에 돌아오면 나를 반기는 분은
모친이 아니고 백모님이셨다.
회상의 뒤안길에는 늘 낯선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
아마도 그것이 가정이라고 생각하고 살아 왔는가 보다.
백모님 댁이 분가를 한 이후로 낯선 언니들이 살았는데
그 언니는 툭하면 집에 가고 싶다고 울고 해서
아마도 조부모님이 많이 달래곤 했다.
그런 언니들이 자주 낯을 바꾸어 들락거리던 집
내가 성장하면서 모친 일을 도와 줄 수 있을 무렵에는
생소한 언니들은 기억에서 묽어져 갔다.
제사가 엄청 많은 집, 조모님의 훈계아래 제사수발도 했다.
그 여타 시간에는 다락에 숨어서 책보는 일이 제일 큰 기쁨이었고
엄하기만 하던 아버지께서 무슨 일인지 책 외판원 아줌마를 통해
전집이란 걸 사들였다.
막내삼촌도 손을 대지 않고 하물며 동생들도 관심이 없으니
나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다섯째와 막내는 태어나는 것도 지켜보고
예쁘기 짝이 없는 그 동생들은 거의 내 몫이었다.
해서, 그렇게 하고 싶은 합주단에서 실로폰도 돌려주고
세월은 그렇게 흐르면서
사물에 호감을 가지고 그려댄 그림들의 상을 받아도
인정하지도 않은 것들인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나 도서실과 그림그리기는 아마도 유년의 전부였을 것이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바뀌어도 현실을 직관하기란
참 쉽지 않았다.
긍정과 부정이 집합체를 이루다보니 사상으로 굳어져갔다.
그 세월이 또 흐르고 보니
중성인지 중용인지 유사한 것이 만들어졌다.
그러한 사상이 만들어지는 구비란
한 쪽은 자신의 삶이 현제진행형으로 매사 인지 시켜야 속 시원한,
한 쪽은 이해 할 수 없으므로 귓속을 마냥 통과 해버리는 노하우를,
나는 이제 한 쪽 귀가 안 들려, 노래하다가 근래 멍멍하다.
사는 것은 별거 없다
아무리 잘 살았어도 갈 때는 한 줌이요.
아무리 못 살았어도 갈 때는 한 줌이다.
제 아무리 기를 써도 단 일 분의 생명의 시간을 줄이거나 늘릴 수 도 없으므로
작지만 살아 있을 때 나누고 베풀면 기이하게도
모두 채워진다.
중학교 시절 주변이 죄다 궁핍한 아이들이었지만 직관하지 못했다.
살면서 그런 현실을 만났지만
이렇게 저렇게 살면 되지 옹색함을 발산하는가,
결론은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장한 환경도 중요하지만 긍정적인 사고에 힘을 쏟아 넣으면
다 잘 될 것이라는 삶의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