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방/삶의 단상-수필

오래된 취재-2

은빛강 2008. 3. 5. 23:29

[나의生 나의藝] 10. 궁중음악인 성경린

경향신문|기사입력 2004-12-08 17:51 |최종수정2004-12-08 17:51
성경린(成慶麟·93)은 16세 되던 1926년부터 현재까지 약 80년간 그 간고한 시대에 궁중음악 외길을 걸으며 그 맥을 이어왔다. 5살때 부친 작고 후 그를 비롯한 5남매는 어머니의 ‘가녀린 팔에 매달려’ 살아야 했다.

그는 서울 승동기독학교 졸업 후 이왕직의 말단직원인 외가쪽 아저씨뻘 되는 사람의 권유로 이왕직 아악부원양성소에 입학했다. 이후 그는 궁중음악인의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의 삶을 떠받친 힘은 모든 일에 ‘정혼’(精魂)을 쏟는 자세와 기독교 신자인 외조부의 영향으로 형성된 정직과 성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이다.

이왕직 아악부원양성소는 5년제의 궁중음악인 양성기관이다. 5년에 한번 학생을 선발했고, 학생들에게 월수당 15원을 지급했는데 당시 쌀 한가마니에 7원이었다. 일반적으로 궁중음악은 1921년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의 노력에 의해 보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19년 당시 이미 아악부원 대부분이 노령자이고, 후계자가 없음을 염려하여 아악생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성경린은 “아악생을 양성한 것은 (왕가에서) 악원 보존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다나베 히사오의 기록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재학시절(1926~31)에 대한 여러 구술 중 학습방법과 비파(국악기)에 관한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의 학습방법은 구전심수(口傳心授)에 의한 것이었다. 학생들이 나름대로 악보를 만들어 사용했으나 그것은 참고용이었다. “악보에 의존하지는 않았어. 우리 공부는 그런 거예요. ‘악보’는 나중에 뭐해서 참고하는 거지. 악보에 기대는 건 아니었다고.” 그에 따르면 “대개 ‘나니-르 느헤-르’와 같은 구음(口音)으로 익히고, 악보는 ‘세조실록’이나 ‘대악후보’와 달리 여민락·영산회상은 20정간(井間), 가곡은 본래 32정간이지만 반으로 나누어 16정간으로 그려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이와 같은 구술은 궁중음악의 전승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있는 내용이다.

비파는 교과목에 포함돼 있었으나 악기로서의 기능은 잃고 있었던 것 같다. “비파를 좀 재능있고 뭐하는 사람한테 맡겨야 할 텐데, 성적이 떨어지고 한 사람에게는 뭣하니까(시키니까) 자포자기하드끼, 이제 푸드덩 푸드덩 하니까 애착을 못갖는단 말이야. 그게 재주있는 사람이 하지 않고 좀 열악한 그런 그 뭐에 있는. 재미도 없고 하니까 신명이 납니까. 비파 둘이 있었어. 처음서부터 난 비파 들고 ‘연주’하는 거 보진 못했습니다. 그럼 짐작할 것 아니여?”

이곳을 졸업한 후 이왕직아악부에서 연주생활을 하게 됐다. 수석 졸업 30원, 그 다음은 27원, 25원으로 월급이 정해졌다. 성경린은 공책에 “목표 30원”이라고 적어놓고 공부했다. “예술가로서 대성하겠다고 입지(立志)한 게 아니라, 그저 30원 받아야겠다, 그러고 했어. 목표 30원.”

성경린은 우수한 학생들로 구성된 율려회(律呂會)를 조직, 공부했다. 그 결과 수석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졸업 후 이왕직아악부에서 아공(樂工) 생활을 시작했다. 성경린은 자신을 예술가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술가라는 생각이 내가 없지. 아공이란 생각은 했는지 모르지. 아공이지.”

당시 악원에는 80세 노인 명완벽(明完璧·1842~1929) 선생이 아악사장이었고, 노인 아악수장 8명, 아악사 2명, 그리고 아악생 8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왕직아악부원 아공들은 1년에 4번, 즉 종묘제례악의 연주와 봄·가을 문묘제례악의 연주가 주업무였다. 1~2년에 한번 “이왕전하 내외분(영친왕 부부)”이 귀국하면 인정전 전각 안에서 연주하는 일, 그리고 내빈이 있으면 일소당(佾韶堂)에서 연주하는 일이 연주활동의 전부였다.

성경린은 이왕직아악부가 존속된 것은 종묘제향 때문이라고 했다. “아악부는 이 종묘제향 때문에 ‘존속’했지. 그 거참 고맙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종묘제례악을 연주하기에는 연주자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일무는 김영제(金寧濟·1883~1954) 선생이 책을 참고, 학생들을 지도했다. 실제 제향에서는 ‘고입(雇入·일용직)’ 악수(악사)를 고용해 사방배(四方拜)로 대신했다.

그에 의하면 현재 전승되는 궁중음악은 송사(松史) 이수경(李壽卿·1882~1955)으로부터 이어져오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영제·함화진은 음악인 집안 출신이지만 악원에 늦게 들어왔고, 무동(舞童)을 거친 사람은 이수경밖에 없었다고 했다. 영친왕이 일본에서 들어올 때 인정전에서 10가지 정재(呈才)를 추었는데 그것은 이수경이 지도한 것이고 종묘제례악 악장(樂章)도 이수경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었다.

성경린은 무동으로도 뽑혔다. 이 일은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성경린이 궁중 정재의 맥을 이은 것을 증언하는 내용이다. “족도(足蹈), 그 걷는 것이 그 중 뭘한 거예요. 북적북적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해서 곱게 해가지고.”

해방 후에도 일부 연주자들은 이탈하지 않고 구왕궁아악부란 간판을 걸고 기다렸다. “광복이 되었으니까 더욱 힘을 얻고 나라를 찾고 영광스럽게 되었지만 어디 메인데가 없이, 그때는 어디서 급여나오는 것도 없고, 그냥 매일 참 정성스럽게 나와 가지고 힘을 모으고 뜻을 맞추어서, 그런 시기죠.”

1951년 국립국악원이 설립됐다. 그는 국립국악원장과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의 후신인 국악사양성소(국립국악고등학교 전신) 소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국립국악원 원로사범이다. 그는 늘 궁중음악인의 궤도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삶을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겨 노을에 띄운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고 했다. 한편으론 “국은(國恩)이 망극해” “일마다 천복(天福)이지”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정직한 것, 어떤 일이나 성심성의로 하는 것을 일생의 신조로 삼았다. 또 관직에 있을 때는 좌고우면하지 않는 것, 불편부당한 것을 중시했다. 다방면에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공의 길을 버리지 않고 80년 궁중음악 외길인생을 걸어온 것은 바로 이런 신조에 기인하는 것임을 구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성경린, 문학청년이자 방송인-

성경린은 문학청년이자 방송인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어린이 잡지 ‘신세계’에 투고했고 소설 ‘수난’(受難)을 잡지에 연재했다.

문학 스승은 없었고 일본잡지 ‘개조’ ‘중앙공론’ 등을 탐독했다. 10대 때 문학동아리 ‘희망사’에서 활동했고 윤석중·탁문관 등과 교유했다. 그는 문학을 잘하기 위해서는 다독·다작·다상량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학적 소질은 방송활동 중 라디오·국악·연극 등의 대본을 쓰는 것으로도 발휘됐다.

방송활동의 계기는 일소당에서 내객(來客)에게 해설을 한 것과 유창한 일본어 실력에 기인한다. 그는 1930년대 이후 방송을 통해 국악해설을 했고 국악방송 개원 이후 최근까지도 출연하는 ‘현역 방송인’이다. 초창기 그의 방송은 육당 최남선의 방송을 귀담아 듣고 따라했다.

“육당은 음성이 좋고 음조가 느릿느릿했으며, 음절을 떼는 것이나 억양청탁이 분명해.”

성경린의 방송을 들었던 이화여고 신봉조 교장은 성경린을 국문학 강사로 초빙, 성경린은 1952~66년 이화여고에서 국문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문학활동과 방송활동도 성경린 삶의 큰 줄기를 이룬다.
하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성경린이 궁중음악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한 자양분이었다.

 

☆차원석 [토마] 신부님 도움으로 부족한 저에게 취재를 허락하셨습니다. 1995년 7월-천주교 신앙홍보지[모래알]

 행복한 세상에서 예향을 키우시기를 빕니다.

고 관재 성경린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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