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방/삶의 단상-수필

언론에 비친 천주교 이미지

은빛강 2010. 3. 25. 10:11

09년 상반기 문화와 복음화 포럼
작성자   박찬현(oilcolor)  쪽지 번  호   44654
작성일   2009-07-04 오후 10:47:46 조회수   90 추천수   1

선교와 미디어

주제: 언론에 비친 천주교 이미지

2009년 6월 19일(금) 오후 2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한국의 종교란 자국적인 의미인 단군의 조상을 떠나서, 유교와 불교가 역사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유불 숭상의 근원도 타국에서 들어 온 종교이다.

역사의 한 줄기에 서학이라는 기리스도교(基督敎)가 평등과 자유라는 기조로 자리를 하면서 생명의 존엄성을 재 해석하게 된 종교로 자리 매김을 해 왔다.

근대에 이르러 기독교는 여러 맥락의 개신교와 천주교가 줄기를 이루고 또한 영국 성공회와 작게는 유대교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의 종교는 ‘종교 박람회’란 지칭을 들을 만큼 종교에 관하여서는 보편적이고 자율적인 셈이다.

여러 종단이 자리를 잡은 바탕에는 사람들의 의식 저변에 희망하며 기댈 곳을 무의식적으로나마 마땅한 곳을 찾고 싶어 하는 해석일 수도 있겠다.

신을 불신하는 마음과 사회의 부조리에 대응하는 이들의 저변에는 역으로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기대려는 공간이 자리하고 있음이라고도 보여진다.

자살을 하는 안타까운 마음자리에도 그들은 다음세상을 희구하고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과 또는 이 세상 저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희미한 갈구이다. 삶이 어두운 공간일 수록 가깝게 다가앉는 곳은 기댈 언덕이다. 그것을 종교는 어루만지는 층간을 맏고 있다하겠다. 그러므로 인간과 종교는 결국 불가분의 관계인 셈이다.

 

한국에 가톨릭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국가가 혼란한 시기 인권 확립에 기여를 했다. 민주화를 외치던 길목에서도 가톨릭은 침묵을 하지 않았다. 그 외 생명 존립등과 여러 괄목 할 시대적 역할에 시사하는 폭이 매우 컸다는 의미이다. 선교와 미디어 포럼에서 언론에 비친 천주교 이미지를 다루었는데 조선일보‘김한수 기자’가 “종교 담당 기자가 본 천주교 이미지” 제1발제자로 나왔다.

전체적인 맥락은 시대적 징표인 故김수환 추기경님을 통해 한국사에 종교계 지도자로써 일획을 그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곳 발화점이 된 역사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듯이 혼란한 정국에 평화의 기둥으로 짙게 투영 된 그림자이다라고 해석한다. 故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삶의 한 세기 종지부를 찍을 즈음에는 '한국역사의 별이 졌다.'고 말을 하던 당시, 그분은 사회 통념으로 여겼던 국민들이 기댈 언덕으로 부각 되었다.  외부에서 바라 본 천주교회는 ‘희생과 헌신’의 종교라고 단언 했었다. 또한 이점은 평신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직자와 수도자의 모습에서 단편적으로 느낀 점들을 서술했다.

제2발제자인 “박문수 박사”는 한국천주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단락을 짧게 나눌 수 없는 주제이다. 차후 이분의 책자를 통해 많은 이들이 접하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제1발제자는 이어 천주교회의 단점인 “까칠하다.”라는 표현을 들추었다.

그 단편적인 일례는, 교계지도자와 성직자를 취재하려 들면 기자를 힘들게 하는 점을 들었다. 천주교회의 일부 단체를 취재한 기사가 나간 뒤, 종교단체에서 오는 반응은 무척 깐깐함이라고 풀이를 덫 붙였다.

이에, 차후 "좀 더 긴밀해지면 천주교회가 일간지에 오를 빈도 수 와 기사량이 많지 않을까"란 희망사항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 김민수신부님의 답변이기도 했던 내용이다. 주로 간발성으로 짤막한 내용과 '천주교를 담은 내용의 양이 아주 저조하다.'라는 지적을 하셨다.

김한수 기자의 입장을 이해는 한다. 보편적으로 천주교 성직자 수도자들은 외부를 생활인 삶을 드러내지 않고 그 직분에 우선 사항을 두었으므로 그럴 법도 하다. 

선교라는 주제를 놓고 보았을 때도 드러내고 알려져야 하지만, 성서는 신앙인들의 생활이 곧 선교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율의지이므로 천주교신자들의 삶을 통해서 눈에비치는 단편적인 모습이 전부일 수도 있다. 이점은 무척 어려운 난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삶은 어려운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그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 신앙의 끈을 튼튼히 엮어 냄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개개인 앞에 닥쳐 온 난관 봉착은 사실 스스로 해결하기에도 벅찬 일이다. 단지 신앙이란 범주 안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걸어 가야하는 고난의 길은 외부로 우러나는 모습에서 이기적이라고 볼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난관을 침묵과 기도 생활로 이끌어 나가는 삶 자체가 무척 버거운 현실이다. 

미사가 끝날 때, '가서 복음을 전하시오!' 라고 매듭을 짓지만, 그것은 복음적 삶을 추구 할 때 보여지는 선교이기 때문이다. 말(馬)을 물가에는 데려가도 물을 먹는 방법은 온전히 말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결론은,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이다.

무거운 삶의 길을 걸어 가더라도 양심에 누가 되지 않은 마음가짐과  말(言語)이 주는 신뢰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신앙인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높은 분을 향한 자세이기도 하다.

뜨거운 태양이 사람의 옷을 벗기듯이 항구한 기도 생활은 무언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백 마디의 말 보다 따뜻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 효과적인 모습이다.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자신도 한 없는 죄 속에 살아가므로 타인을 향하여 비난과 질책은 어떠한 경우에도 삼가 해야 할 덕목이다.

매스컴은 빠른 속도로 전달 되기에 그 안에 두터운 신뢰가 들어 차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처음부터 끝 까지 모든 것을 섭리하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무형의 높으신 분이시다.

성서는 '우리의 뼛속에 우러나는 생각 까지 모두알고 있다.'라고 전하고 있다.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 돌아 보면 후회 되는 일도 많고 잘못 된 시간도 분명히 있다.

그러한 점을 간과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 보는 삶이라면 선교는 이루어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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