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방/삶의 단상-수필

우리의 근대 건축물들을 찾아 떠난 그들의 여행

은빛강 2010. 5. 30. 14:21

다락편지 제 565 호               
1924년에 지어진 인천 우체국.
80년 넘는 세월의 그리움과 설렘을 지닌 곳입니다.
백 원 짜리 낡은 지폐 한 장에서
시작된 기묘한 여행


    몇 해 전 어느 날, 여자는 어머니로부터 봉투 하나를 건네 받습니다. 그 봉투 안에는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가지고 계셨던 지폐가 들어 있었지요. 조선은행에서 발행된 백 원짜리 낡은 지폐.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지폐 속에서 여자는 힘든 시절을 보내신 할머니의 지난 세월과 함께 우리의 과거를 되짚어 봅니다. 오늘날의 수집가들에게 백 원짜리 지폐는 대략 백만 원의 가치가 있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옛 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 그들이 거닐었던 거리와 살았던 집들은 지금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을까요?
    우리에겐 100년 전의 건축물이 몇 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이전의 문화재들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반면, 근대의 유산들은 망각 속에 묻어가고 있지요. 일제 강점기의 쓰라린 역사가 배어 있다는 이유로 당시의 흔적들을 흉물이라도 되는 양 부수고 외면하고 방치했죠. 그렇게 근현대사의 흔적들은 사라져갔고, 우리의 역사 또한 아쉽게 지워진 건 아닐까 합니다. 건축잡지 에디터 출신의 여자와 건축 디자인을 하는 남자의 여행은 이런 안타까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또 언제 사라질지 모를 우리의 근대 건축물들을 찾아 떠난 그들의 여행,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를 소개합니다. / 여행 담당 김기옥 (flytoafrica@yes24.com)

아침에 온 이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건축물들, 90년대 청산한 중앙청사와 서울역을 비롯 소공동 한국은행, 그리고 덕수궁 석조전  그것들은 한눈에 봐도 한국의 나즈막한 주택에 비해 조금은 세련되게 도심의 축을 잡고 서 있었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허물고 사라지는 그 건축물들, 그것들을 허무는 것에 관하여서는

첫째는 일본의 강점기의 역사를 지우기 위함이고, 둘째는 중요한 역사를 지닌 채 공기관의 건물들이 일본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일본이 성장하는 2세들에게 자신들의 식민통치를 산교육장으로 이끌어 내는 역사 관광이다.

그렇다면  그 건축물만 축을 잡고 보자면 건축가들에게는 더 없는 건축 자료일 것이다.

그런데, 그 건축물이란 것은 일본 전통양식도 아니고 유럽 양식의 건축물인데 왜 그런 양식으로 건축을 했을까란 의문이 든다.

일본 전통양식 그대로 건축 했다면 필시 온전하게 남아 있을리 만무하다.

해서 그들은 유럽 양식에 일본 색이 가미 된 건축, 곧 퓨전건축양식이다.

유럽의 교회 양식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놓여진 건축물은 십자가 형태가 주조이다.

그들은 그것에 착안하여 위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날일(日)자 형태의 인장같은 건축물이다.

상공에서 내려다 본 건축형태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 자체가 유럽풍도 일본 고전 양식도 아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추악한 행위와 인명살상과 더불어 용납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전범자들이다.

그 건축물들은 그렇게 비중깊은 자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100년 이전의 건축문화재는 당연히 고수해야 하는것은 합당한 일이다. 아픈역사를 허물어서 아쉽다는 것은 건축물이 무슨 죄이냐는 생각인데

그 건축물을 허문다고 해서 마음속의 아픔까지 지워지지는 않는다. 그 전범국가는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발톱을 숨긴 위협적인 존재로 늘 도사리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해서,가능하다면 이 땅에 세워진 그 역사의 잔해를 우리 전통 양식으로 바꾸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문제는 넓고 긍정적으로 생각 해야 한다는 사안과는 전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박찬현

 

 

"일제, 식민지배 정당화 위해 석굴암 복원"

연합뉴스 | 입력 2010.05.31 08:30 |

 

강희정 서강대교수 한국고대학회 학술대회서 주장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일제강점기의 석굴암 복원이나 신라고분 조사가 일제의 문화정책 홍보와 식민지배 정당화에 이용됐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강희정 서강대 교수는 '일제강점기와 우리 문화유산의 오늘'을 주제로 다음달 4일 오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고대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주제발표문 '일제강점기 한국미술사 구축과 석굴암의 발견'을 통해 일제의 석굴암 복원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입증할 예정이다.

강 교수는 한국고대학회가 31일 배포한 발표문에서 일제가 "자기들이 (석굴암을) '발견'했고 '수리'했으며 '복원'했다"고 선전한 것은 자신들이 영화로운 조선의 과거를 되살릴 수 있는 식민본국임을 강조하려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일제는 석굴암을 "마치 이전에는 없었던 것인 양" '발견'됐다고 선전했으며 수리와 복원을 통해 "누구나 한 번쯤 가봐야 하는 제국주의의 성공적 지배의 상징"인 관광지로 탄생시켰다.

이에 따라 석굴암은 처음 조성됐던 종교적ㆍ예술적 맥락을 잃어버리고 '일제에 의해 변모된 조선 근대의 표상'으로서만 대중에 인식되도록 '재맥락화됐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일제가 석굴암과 같은 당시 조선의 유물을 평가절하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거꾸로 석굴암과 본존불을 동아시아에서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라고 칭찬했다.

그 이유는 석굴암을 비롯한 조선의 옛 유물은 결국 '전근대'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에 의해 '근대화'를 겪어야 할 대상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제는 석굴암과 본존불을 칭찬하면서도 이와 대비해 당시 조선의 현실이 '쇠락한 문명'이라는 것을 늘 강조했다.

실례로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의 '조선미술사'에는 조선의 미술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에 걸쳐 발달의 정점에 달했고 고려에는 쇠퇴의 조짐을 보이다가 조선시대에는 쇠퇴를 거듭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러한 일제의 평가는 결국 1920~1930년대 조선의 지식인들까지도 과거 유물에 대해 찬탄하면서도 당시의 처지를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 평가가 발달한 문명을 가진 일본이 낙후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가 됐음은 물론이다.

강 교수는 조선의 문화재가 아름다운 여성적 곡선미를 지녔다고 평가되는 것 역시 일제의 이데올로기가 주입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식민지 조선을 '약자(弱者) 여성'에 비유함으로써 '남성 제국주의'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라는 것이다.

김용성 중원문화재연구원 원장은 함께 배포된 발표문 '일본인의 신라고분 조사'에서 1920년대까지는 한반도 침탈을 위한 제국주의 인류학ㆍ고고학 조사에서 소외됐던 신라고분이 1921년 금관총(金冠塚)의 발견으로 활성화된 점에 주목했다.

그는 금관총에서 화려한 유물이 출토돼 관심이 집중되자 일제의 국위선양과 문화정책 홍보에 도움이 됐고 이 때문에 이후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 서봉총 (瑞鳳塚) 등의 다른 신라고분 발굴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김 원장은 일제가 이처럼 국위선양과 홍보에 도움될 화려한 유물에만 집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무덤형태와 봉분구성 등은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고 보고 일제가 발굴한 신라고분들을 적극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기성 한신대박물관 특별연구원은 '일제 강점기 석기시대의 조사와 인식'에서 일제강점기에 고고학자이자 인류학자였던 토리이 류조(鳥居龍藏)가 했던 석기시대 관련 연구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조상이 같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밑거름이 돼 '한일강제병합 정당화'에 쓰였다고 설명했다.

comm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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