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이야기/자동차

발명과 열정의 아이디어-최초의 자동차

은빛강 2010. 9. 17. 15:55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위치한 메르세데스-벤츠 박물관. 때 마침 앞마당에서 벌어진 왁짜지껄한 시승행사에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줄서서 시승하는 차는 다름아닌 1886년에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차 ‘페이턴트 모터바겐 (Patent Motorwagen)’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승차량은 당시 만들어진 차는 아니고, 이를 완벽하게 재현한 복제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에 올라타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보니 120년 전 이 차를 만든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한 감동이 있었다. 우리 일상 속을 파고든 자동차. 이 차를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구였을까.

 

 

칼 벤츠의 아이디어와 고틀립 다임러의 열정

1886년 칼 벤츠는 “말 없이 달리는 마차를 만들겠다”며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핵심 부품인 가솔린 엔진은 이미 천재 발명가 니콜라우스 오토가 만들어냈지만, 오토는 이걸 자동차에 장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칼 벤츠 이전엔 누구도 ‘말 없이 달리는 마차’를 상상조차하지 못했다. 때문에 칼 벤츠는 이 차를 만들어 ‘자동차’라는 이름의 특허를 낼 수 있었다. ‘페이턴트 모터바겐’이란 우리 말로 ‘특허 자동차’라는 뜻이다. 사실 이 차의 아이디어는 다른 곳에서 얻었다. 오토와 함께 일하던 고틀립 다임러빌헬름 마이바흐는 1883년 자체 개발한 엔진을 내놓고, 2년 후 이것을 이용해 탈 것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자동차라기보다는 오토바이에 가까운 형태였다. 작업실 문이 좁아 여기로 드나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1886년 독일인 칼 벤츠가 만든 페이턴트 모터바겐.
<출처: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제공>

1885년 독일인 고틀립 다임러와 빌헬름 마이바흐가 만든 최초의 2륜 자동차와 작업실.
<출처: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제공>

 

 

칼 벤츠의 부인 베르타 벤츠(Bertha Benz)는 1888년, 이 차를 대중에 보이는 것을 꺼렸던 남편 칼 벤츠의 완벽주의를 못 견뎌 남편이 잠든 사이, 직접 이 차를 몰고 106km에 달하는 길을 달렸다. 베르타 벤츠는 주행 중 직접 카브레터 청소를 하고 브레이크 라이닝을 교체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프랑스인 에밀로저는 이 뉴스를 접하고 칼 벤츠로부터 라이선스와 설계도를 받아 1888년부터 프랑스에서 이 차량을 생산 판매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차를 만든 것은 독일인이지만, 최초로 차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인이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직접 타본 이 차의 운전은 쉽지 않았다. 운전대처럼 차를 조종할 수 있는 작은 막대와 가속 페달의 역할을 하는 막대, 그리고 브레이크 페달 등을 부지런히 조작해야 했다. 2명이 앉은 상태에서도 달리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이 차의 최고 속도는 16km/h에 달한다. 통통거리는 소리가 시끄럽지만 머리를 휘날리며 달리는 느낌이 상쾌하다. 모든 차의 아버지,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했던 바로 그 차를 타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도 먹먹해진다.

 

최초의 차를 만든 칼 벤츠와 최초의 오토바이를 만든 고틀립 다임러가 창업한 회사는 추후 합쳐져 다임러-벤츠라는 자동차회사가 됐다. 그러나 둘은 살아 생전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사는 지금 다임러 AG라는 이름으로 사명이 변경돼 메르세데스-벤츠 브랜드를 내놓고 있다.

 

 

가솔린 엔진에 비해 100년이나 앞섰던 증기 엔진

내연기관 차량에 앞서 증기기관을 이용한 자동차도 있었다. 1771년 프랑스의 니콜라스 조셉 쿠노는 사람이 탈 수 있는 최초의 증기 자동차를 만들었다. 가솔린 내연기관 엔진에 비해 100년이나 앞선 것이다. 18세기 유럽에는 증기기관 차량이 버스로 쓰일 정도로 보급됐지만, 19세기 초 가솔린 엔진의 발명으로 인해 자취를 감췄다.

 

유럽에서 18세기에 널리 사용된 증기기관 버스.

1771년 프랑스의 니콜라스 조셉 쿠노가 만든 최초의 증기기관 자동차.
<출처 : Roby at en.wikipedia.org>

 

 

미국에서는 내연기관에 대한 특허를 피하기 어려워 20세기 초까지도 증기자동차가 생산됐다. 100년 가까이 발전한 이 증기기관 차량은 비약적으로 성능이 발전해 1906년 플로리다에서 개최된 ‘스피드위크’ 경기(현재 데이토나500)에서는 시속 203km라는 대기록까지 나왔다. 요즘의 최신 가솔린 차량으로도 도달하기 힘든 속도다.

 

증기 엔진은 당시 가솔린 엔진에 비해 월등히 강력해 12명을 태우고 시속 60km까지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헨리 포드가 시속 70km 이상으로 달릴 수 있는 가솔린 엔진 자동차인 모델T와 저렴하고 빠르게 만들 수 있는 ‘대량생산’이라는 개념을 내놓으면서 증기기관 자동차는 점차 사라졌다.


최근 증기기관 자동차는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스웨덴 자동차 회사 사브(SAAB)는 1973년 오일파동으로 인해 160마력을 내는 증기기관 콘셉트 자동차를 만들기도 했다.

 

독일 폭스바겐그룹도 1996년 220마력의 증기기관 엔진을 만들어 소형차에 시험 장착했다. 무엇보다 가솔린, 디젤, 에탄올 등 어떤 연료를 이용해서도 차를 달릴 수 있다는 장점이 돋보였다. 하지만 당시 시장 상황이 증기기관을 받아들이기는 시기상조였다고 판단한 폭스바겐 그룹은 차의 시판을 무기한 연기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가까운 미래에 증기기관 자동차가 전기자동차와 함께 자동차 시장의 큰 축을 차지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스포츠카, 하이브리드카 만든 천재 포르쉐 박사

최초의 스포츠카는 오스트로다임러의 프린스 헨리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프린스 헨리는 당시 5.7리터 가솔린 엔진으로 95마력의 힘을 내던 4인승 오픈카였다. 이 최초의 스포츠카 또한 천재적인 발명가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설계했다. 포르쉐 브랜드의 첫차가 만들어지기 30년 전의 일이다. 오스트로다임러는 최초의 차를 만든 다임러의 아들 폴 다임러가 기술책임을 맡고,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차를 설계하던 회사다. 이후 폴 다임러는 마이바흐의 뒤를 이어 다임러사의 기술책임을 맡기 위해 다시 독일로 돌아갔고 포르쉐는 이곳에서 다임러-벤츠의 주요 차종을 만들어냈다.

 

포르쉐는 처음부터 자동차를 만든 인물은 아니다. 일찍이 전기회사에 취직했던 포르쉐는 이후 이 기술을 살려 1890년에는 전기차를 만들었고, 이어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 전기 차량인 믹스티(Mixte)를 만들었다. 요즘의 일반적인 하이브리드차량과 달리 작은 엔진으로 발전기를 돌리고, 여기서 발전된 전기로 바퀴에 달린 전기모터를 돌리는 발상이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설계한 최초의 스포츠카 프린스 헨리.
<출처 : Brian Snelson at en.wikipedia.org>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100년 전에 만들었던 만든 스포츠카와 시리얼하이브리드 차량은 최근 들어 다시 그 효용성이 부각되고 있다. 자동차 메이커들은 앞다퉈 스포츠 세단을 만드는가 하면 미국 GM 등은 시리얼하이브리드 차량을 금년 중에 내놓을 예정이다.

 

 포르쉐 356 스피드스터





1952년 이른 봄의 아우토반을 폴크스바겐과 많은 닮은 차 한대가 슈튜투가르트에서 에히타딘겡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 속도는 아무리 보아도 100마일(161km/h) 이상 되는 것 같았다. 교통 위반차를 잡으려고 숨어서 대기 중이던 점령군(당시 서독은 영국?미국? 프랑스 군정하에 있었다.) 순찰차가 갑자기 이 차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점령하의 아우토반은 지금(속도 무제한)과는 달리 80km/h의 속도 제한이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얗게 칠한 'VW’형의  차에 타고 있던 베르크하임 백작은 힐끗 스피드미터를 보았다. 시속 180km였다.. .브레이크를 밟는 것은 위험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도망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베르크하임은 엑셀러레이터를 더 밟았다. 순찰차는 어느새 작아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순찰차에는 무전기가 있었다. 추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즉시 20마일(32km) 전방의 검문소에 그 차의 인상과 통과시간을 통보해 운전자를 체포하도록 지시했다.


검문소에는 2사람의 미국인 헌병과 한사람의 독일인 경관이 있었다. 베르크하임은 여전히 질주하고 있었지만 빨간 램프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눈에 띠어 서서히 속도를 내려 시치미를 뗀 얼굴로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헌병은 시계를 보고 나서 차를 보았다. 확실히 수배중인 차와 비슷했다. 그러나 순찰차의 연락을 받고나서 겨우 11분밖에 되지 않았었다.

이런 1,000cc가 될까 말까 한 차가 20마일을 11분에 달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계산해보면 175km/h 되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소곤소곤 말을 주고받더니 경례를 붙이면서 말했다. “미안합니다. 당신 차와 비슷한 차가 속도위반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곧 그 차가 오겠지요.”


속도위반을 문책 받지 않은 아마 세계에서 유일한 경우겠지만 이 ‘VW'의 차가 포르쉐 356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는 또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즉, 포르쉐는 폴크스바겐 비틀을 기본으로 태어났지만 슈퍼 카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라는 말이 잇지만 포르쉐 356에는 이 말이 바로 들어맞는 것 같다.

 
 
최초로 자동차를 구매한 사람은?



세계 최초로 자동차를 산 사람
파리에  살던 벨지움의 기술자 에떠앙르 르노와르가 1865년 세계 최초로 석탄가스 엔진을 단 자동차를 1863년 2행정 엔진을 단 세바퀴 아를 발명했다.
평균시속 6km로 달리는 이 가스차의 소문을 들은 러시아 알랙산더 2세가 크게 흥미를 갖고 주문해 사간 것이 최초의 자동차 판매였다.
 
 
 세계 최초의 관광버스



최초의 관광버스는 1873년 영국의 토머스 쿡 상회가와 프랑스의 증기자동차 메이커인 아메디 볼레사가 공동으로 운영했다.
이 차의 최초 관광코스는 파리→엑스레방→ 풍테블로→ 아바론→디종→ 생로랑→ 제네바 등을 거치는 6일간의 대륙 여행 코스였다.

프랑스의 증기자동차 메이커인 드 디옹사가 제작한 이 버스는 차체의 양쪽을 개방하고 운전석과 객석 사이를 유리로 막았으며, 뒤에 유리창을 내어 뒤를 내다볼 수 있게 했다. 평탄한 길에서는 시속 16km의 속도를 냈으며 하루에 6시간씩 달렸다. 화물은 승객 1인당 20kg 이하로 제한했다.
정기 관광 버스가 본격적으로 다닌 것은 1910년 영국의 이스트만 채프먼 상회가 운행한 23인 승 데니스 휘발유 버스로 북 웨일즈를 6일동안 여행했다.

 

배기량 '8만1200cc' 자동차가 존재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통의 엔진을 가진 차는 1928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만든 경주용차 '화이트 트리플렉스(White Triplex)'로서 12기통의 항공기엔진 3개를 얹어 36기통에 배기량이 무려 8만1200cc로서 1500마력의 힘을 냈다.
무게가 4톤이나 되는 이 차는 최고시속 334km로 당시 세계 최고 속도를 기록했으나 도로에서는 탈 수 없었다. 이듬해인 1929년 미국 데이토나 비치에서 다시 신기록에 도전하다가 모래언덕을 받고 레이서와 함께 지상에서 영원으로 사라졌다.

 

● 테일 핀 디자인의 캐딜락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창조했던 '하리 얼' -2-


 
하리 얼은 1893년 할리우드에서 마차제조 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얼이 자동차에 인생을 걸게 된 동기는 1911년 그의 아버지가 마차 제조업에서 자동차 차체제조업으로 가업을 바꾸면서부터였다. 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아버지의 사업을 본격적으로 돕다가 1918년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넘겨받자 아름답고 호화로운 차체 만들기로 돌아섰다. 그의 미적 감각과 과학적 진취성으로 만든 맞춤형 차체는 곧 이름이나 특히 할리우드의 톱스타들이 주 고객이었다.

 
1927년 6월 얼이 GM에 합세한 데 자극 받은 탓인지 다른 업체들도 디자인부서를 검토하게 되었다. 크라이슬러는 GM이 얼을 영입한 지 1개월 만에 자체 디자인부를 만들었다. 크라이슬러의 차체설계 책임자 올리버 클라크 밑에 들어간 디자인 부장은 휴버트 헨드슨이었다. 1928년 앨 리미가 오번 오토모빌사의 디자인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페이지 자동차의 그레이엄 페이지 사장은 1933년 선보일 공기역학적 미래형 자동차의 디자인을 모노먼 벨 게디스에게 의뢰했다. 그러나 대공황이 그 계획을 짓밟고 말았다.

 
포드 자동차는 1932년까지 디자인부를 두지 않고 버텼다. 얼마 후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 포드가 최초로 맞아들인 전속 디자이너 유진 그레고리는 1935년 포드의 스타일링 부를 창설했다. 패커드는 오랜 기간동안 단 한 명의 디자이너를 고용했다. 그 사람이 워너 구버리츠 였다. 이들 미국 초기 디자이너들의 영향력은 하리 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얼은 카 스타일리스트라는 새로운 전문직을 도입한 것 외에도 그 분야를 이끌어가는 기관차였다. 클레이 모델을 디자인에 필수적 조건으로 도입한 것도 그였다. 미술가의 비전을 3차원의 실체로 보여주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었다. 그와 동시에 클레이 모델을 실물크기의 목-업(Mock-up) 모델 제작에 활용했다.

 
일단 클레이 모델의 쓰임새가 확인되자 다른 제조업체들도 그 뒤를 따랐다. 자동차 초창기의 디자인에 얼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막강했다. 훗날 독립 한 디자이너들은 거의 예외 없이 얼의 문하에서 일했다. 얼이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4대 자동차 회사의 설계담당 부시장은 모두 초기 그의 문하생이었다. GM의 빌 미첼, 포드의 진 보디내트, 크라이슬러의 엘우드 엔젤과 그의 전임자 버질 엑스너 그리고 아메리칸 모터스의 딕티그가 그들이었다.




(캐딜락 '엘도라도'(사진아래), 하리얼의 작품(사진위)
 
최초의 자동차극장은?



자동차를 탄 채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드라이브 인 시네마(Drive in Cinema)는 1934년 미국 뉴저지주의 칼덴시에 처음으로 생겼다.
또한 1937년 미국 LA에는 차 안에서 입출금을 할 수 있는 드리이브 인 뱅크가 나타났다.
 
최초로 비행기에 공중급유 성공한 美 윌리스 로드스터



최초로 비행기에 공중급유 성공한 자동차 미국의 윌리스 로드스터 

1953년 미국 캐리포니아의 한 비행장에서 사상 처음으로 자동차가 비행기에 공중급유를 시도하여 성공했다. 오픈카인 윌리스 로드스터가 머리위로 낮게 자동차속도와 같이 날아가는 경비행기 밑바닥 연료탱크에 연료 주입하는 도전에 성공했다.

1908년 미국 뉴욕 출신의 사업가 존 윌스가 세운 윌리스 오배랜드 자동차회사는 1910년대에 이르러서는 미국에서 포드 자동차 다음 큰 업체로 성장했으나 1953년 경영난으로 카이져 자동차에 매각됐다. 그러나 카이져에서는 윌리스 브랜드 네임은 그대로 이어 개발한 4륜구동 오픈카가 윌리스 로드스터이다.

 

최초로 하늘을 난 자동차





미국의 컨설리데이티드 에어크래프트사는 1947년 세계 최초로 승용차에 날개와 꼬리를 달고 앞에는 프로펠러를 단 비행기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자동차비행기는 하늘에서는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지만 땅위 도로에서는 날개를 접을 수 없어 교통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주행 금지를 당해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그 후 1997년 미국의 디자이너인 에드 스위니는 배기량 5,900cc에 145마력의 엔진을 가진 경비행기 모양의 비행자동차 `에어로카(Aerocar)를 만들어 하늘과 도로에서 마음데로 날고 달렸다. 날때는 활주로가 필요한 이 에어로카는 도로에서 달릴 때는 뒤에 연결된 소형 트레일러에 날개와 꼬리, 프로펠러를 떼어 넣고, 날 때는 끄집어내어 다시 조립해야 한다.

 

최초의 카레이스



최초의 카레이스는 프랑스 자동차공업의 개척자였던 귀족 출신인 알베르 드 디옹이 벌였다.

그는 당시 증기엔진 기술자였던 조지 부통과 손 잡고 자동차를 만들어 팔기위해 ‘드 디옹 부통’ 자동차회사를 파리에 새우고 1885년부터 소형 증기자동차를 만들었다. 드 디용은 자기의 자동차를 선전하는 방법을 찾다가 자동차 경주를 열어 자기 차의 속도와 성능 그리고 편리함을 과시하려 했다.  드 디옹은 증기자동차를 가진 4명의 친구들과 1887년 파리 상제리제와 베르사이유 궁 사이 30km에서 레이스를 벌였다.
이때 드디옹은 자기가 만든 증기엔진 3륜 차로 최고시속 45km로 1등하여 파리지앵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