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방/오늘의 생각

내가 만난 탈북 민

은빛강 2011. 3. 25. 05:30

 

내 블로그의 검색어 가운데 [북한 인권] 검색어가 늘 떠 있다.

나에게는 특별한 정보란 별로 없다. 있다면 아주 오래전 이야기 한 마당뿐이다.

요즘은 남하한 새터민 주민도 많고, 그곳으로 봉사활동을 나가는 이들도 꽤 된다.

그리고 인터넷은 많은 알고리즘을 통해 많은 량의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던 시절의 그 북쪽 사정이란 아주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94년도 여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94년 7월 24일 일요일]

일가족이 탈북을 기도해 안전하게 남한으로 들어 온 당시 언론에서는 대대적으로 보도를 한바가 있다.

[여만철-직업-의료인] 가족으로는 부인과 2남 1녀이다.

그 가족들이 탈북을 한 사연은 일부는 언론에 보도가 되었다.

내가 그 가족들을 취재 할 때는 스스로도 궁금함이 있었던 바였다.

나도 반공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시대였기에 북한에 관하여서는 제대로 알고 있는 바는 없다.

 

처음 그 가족을 접했을 때, 가족 모두 상당히 피폐해 보였다.

당일, 북한이 고향이신 어르신들이 대다수 남아 있었다. 고향 소식을 조금이나 해갈하려는 마음들로 보였다.

나는 그 어른들의 대담을 뒤로하고 청소년들과의 만남의 자리로 이동을 했다.

청소년들은 마냥 신기해하였다.

상호 궁금한 점들을 질의를 하였었던것  같다.

주로 취재를 나갈 때는 수첩만 가지고 나간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미 상대방의 마음들이 내 마음 속에 그려 있기에 다른 물건들이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그날은 녹음기를 가지고 갔다.

내 짐작대로 나의 질의에 너무 빠르게 응답을 해서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점에서 우선 남과 북의 원활하지 못한 소통과 격리감을 느껴야 했다.

 

당시 질의응답에 취한

여금주(장녀, 20세)

  금용(장남, 18세)

  은용(차남, 16세)이었다.

우리 학생 한 명의 질의가 웃음을 짓게 했다.

학생: 북쪽에는 불량학생들이 있나요?

금용: 10세부터 조직 생활을 하게 되는데 불량학생은 한 학급에 한 두 명 정도이다. 그들은 학교별로 조직단체로 이루어 졌으며 집단 구타 등 패싸움을 한다.

고등중 2-3학년(中1학년)정도 되면 군입질(군것질) 할 것 없어 잎담배를 종이에 말아서 피운다.

그런데 여기는 군것질 할 것도 많고 여가선용 할 장소도 많은데 왜 불량학생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고등중 6학년이 되면 모내기철에 40일간 수업은 하지 않고 농촌에서 노동을 한다.

그런 시기에 거의 흡연을 하게 된다.

 

금용: 한 가지 물어 볼게 있다. TV에서 방영하는 [공룡 선생]에서 학생들이 선생님의 부당함에 관하여 마음대로 반문 성토 할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것인지, 아니면 선전용인가?

일동: 아뇨!

학생: 북한에서 귀순한 가수 김용을 아시나요? 아신다면 금주누나가 한곡 불러 주세요.

금용: 북한에서는 몰랐다. 여기 와서 TV를 통해서 한번 보았다. 잘 알지 못해도 우리 누님 한곡 부를 겁니다.

금주: 북한에 있을 때 잘 불렀던 "꿈꾸는 백마강"을 부르겠습니다.

-90년대부터 김정일 노래로 일괄 되어 있다. [친애하는 그이께서 건강하십니까?]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 대체적으로 흥미가 없어서

[칠보산 악단]이 작곡해서 내 보내는 노래와 연변을 통해서 들어오는 노래가 많이 불리어 진다.

그러나 여기 와서 보니 그 가요들의 대부분이 남한의 노래들이었다.-

 

특징적인 내용은

우리가 무척 궁금해 왔었던 [기쁨조]에 관해서였다.

학생: 우리나라는 TV에 출연 할 수 있는 연예계진출이 꿈인데, 누나는 상당한 미인이신데 연예인이 되고 싶지 않으세요?

금주: 모든 학생들 역시 꿈은 있다. 가수나 배우들을 지망하나 그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매년마다 평양 연극 영화대학에서 각 고등중학교에 직접나와 선발해 간다.

그 기준은, 첫째, 인물심사(용모), 둘째, 가정환경을 본다. 6.25때 월남한 가족이거나 정치범수용소에 감금 된 가족은 제외된다.

그래서 꿈과 희망은 있을 수 없다. 당에서 직업이 선택되고 배치되어진다.

 

-북한에서도 미인대회가 있는가?

금주: 곱게 생겼다는 것이 미인의 개념인데 그런 것은 없다. 다만 있다면 김일성 궁에 발탁되어 가는 것이 5과급대상(기쁨조)이며,

12세에서부터 17세까지 6년간 신체검사를 통해 뽑는다.

저도 솔직히 6년간 꾸준히 매년 신체검사를 받았다.

궁극에는 도에까지 뽑혔지만 평양에서 떨어졌다.

자격 조건은, 키 160cm, 살색(피부)이 맑아야 한다.

다음은 성분확인(신원조회)을 한다.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까 기쁨조의 인식이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거기서는 최대의 영광으로 알고 있다.

아름다운 여자는 누구나 거기에 뽑히고 싶어 한다.

 

학생: 주석궁에 뽑혀간 여인들은 무슨 일을 합니까?

금주: 그것은 국가적으로 비밀이다. 부모는 자식 하나 잃은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서신 왕래도 할 수 없으며 다만 김일성 생일 4.15일과 김정일 생일 2.16일에 당에서 선물을 보내 줄뿐 서로 만날 수 없다.

그리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호위하는 5과급 남성도 뽑는다.

기쁨조는 5과급 남성과 결혼 하게끔 하여 종신토록 그곳에 정착하여 살게 한다.

 

-김일성 죽음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은용(막내): 그래도 16년 동안 김일성 밥을 먹고 자랐는데 처음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북한체제를 반대하여 넘어 왔다 하여도 김일성 우상교육을 계속 받아 왔고, 그 모든 것이 몸에 벤 상태인데 가슴이 덜컥 했습니다.

우리는 북한에서 북침이라 배웠지 남침이라고는 배우지 아니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와서 김일성 교육이 잘못 된 것이라고 알고부터 김일성을 잊기로 생각했습니다.

 

가족들과 점심을 나누면서 한 질의

-북한의 사회 핵심개체가 국민의 1/4이 한국전쟁의 희생자 가족으로 조직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78.2%가 전후세대로써 사상의식이 매우 강하다고 생각한다. 김정일은 그 전후 세대를 뭉치는데 주력한 듯싶은데, 사로청(사회 노동, 청년동맹)이라던가 1993년 (일심, 단결, 충호)라는 정치적  모멘트가 함축된 슬로건을 제시했다고 들었다. 이에 대해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따르는가,

금용: 체제를 불신한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소년단은 300만 인원이며, 사로청은 500만 인원으로 조직되었다.

 

-중국 천안문 사태의 보도를 들은바 있는가,

금용: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지원 한 것으로 알고 있고 북한에는 특별보도 되었다.

-진압을 하는데 북한군이 중국에 지원되었다고 함.-

 

-북한의 체제를 청소년들은 조금도 불신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있다면 어떠한 사건이 있었는가?

금용: 함흥시 서원고등중하교에서 10명의 청소년결사대가 조직되었었다. 그들은 삐라 사건과 체제반대구호의 벽보를 붙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무모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목숨이 둘이 아닌 이상 상상조차 못한다. 체제를 반대해서 나선다는 것은 일가족 몰살을 가져오는 불행이 된다.

 

-동구권 변화는 세계의 흐름에 큰 변화를 주고 있다. 그러나 북한 측은 이 흐름에 미동조차 하지 않은 걸로 안다.

불 합법적 권력이양은 시대, 장소, 상황을 고려 해 볼 때 적합하지 않다. 근간 중국 신화사 통신에 의하면 북한대학생11명이 이에 대응해 대자보를 붙였는데, 그들은 공개처형을 당했으며, 그들의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한명씩 화형을 했다는 보도를 혹시 들은 바 있는지?

금용: 소문으로만 들었다.

 

그들 역시 압록강을 건너 연변의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았었다고 했다.

도강하여 탈출하는 이들을 잡기 위해 연변 일대에 보위부요원이 5만 여명 깔려 있다. 잡히는 순간 연변의 북조선 교포가

볼 수 없는 곳 압록강까지 되돌아와 그 즉시 총살한다. 고 했다.

 

이어서 나는 여만철씨 부인을 모시고 미장원으로 갔다.

짧은 머리로 컷을 치고 그분 얼굴에 곱게 화장을 해드렸다.

참 고와 보였다. 헌데 그분은 "북한에서 이렇게 칠하고 다니면 올바른 정신을 가진 여인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금주 양은 연신 모친에게 옷을 사달라고 졸랐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땀이 흐르고 더웠지만 왠지 마음이 덥질 않았다.

남하를 하느라 영육 간의 고통을 걷어 내고 '가족사진'촬영을 위해 후원인의 스튜디오로 향했다. 

 

그분은 그랬다.

스웨터가 낡으면 속옷을 짜고 속옷이 낡으면 양말을 짠다고 했다.

사는 곳도 직급 따라 성분따라 평양이 될지 신의주가 될지는 당에서 정한다고 했다.

그들의 의식주에 관해서는 참으로 곤해 보였다.

내가 놀라워 한 것은 그들의 입에서는 정치적인 단어들이 기계처럼 술술 나왔다.

남북의 여인네들의 삶이 아주 대조적으로 보였다.

 

우선 공중전화 사용하는 법, 그리고 강남의 비보이 청소년들이 마음 것 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 [놀새족]이라고 칭 할 때 한참을 웃었다.

당시 그들을 만났을 때는 매우 체격이 왜소했다.

몇 년 뒤 TV에서 그들을 보았을 때 금용과 은용 소년은 훌쩍 커 있었다.

매우 예의가 바르고 수줍음이 많던 그 소년들이 청년들이 되어 있음에 기뻤다.

한층 더 멋있어 보이는 청년이 되어 있던 모습 오래 행복하게 잘 살기를 빌어 본다.

그때 사진을 조심스럽게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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