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방/오늘의 생각

감사하는 마음2-스승

은빛강 2011. 4. 3. 02:15

감사하는 마음2

스승

 

고교시절 반과 후 교정은 언제나 고요함만이 흐르는 정적 뿐 이다.

계절 따라 오래된 아름드리 아카시아 나무둥치가 이고 있는 높은 곳에는 레게머리처럼 땋아 내린 하얀 아카시아 꽃줄기들은 장관이다.

땅거미줄이 깔린 어스름 저녁이 오면 박쥐들이 큰 날개를 펼치고 어둠의 허공을 날아다닌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 지어진 학교 뒤 쪽 건물은 검은 망토를 두른 망령처럼 버티고 있다.

그러한 구조들이 현대적 교실건물과 함께 자리를 한 교정에 나는 늘 남겨져 있었다.

 

태어난 지방에서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집안일에 바쁜 엄마는 내가 무슨 일에 흥미가 있는지 그리고 앞날에 관해서는 별다른 목표가 없었다.

단지 여식은 좋은 집안으로 출가해 여필종부로서 사는 삶이 가장 우선적인 일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저절로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은, 엄마에게 직 간접으로 혼처가 들어 왔는데

죄다  장남이고 또한 제사를 도맡아 지내는 집안들이었다.

한 사람은 내 여동생의 초등학교 담임이었는데 내 집에 자주 왔다. 그는 정말 타고난 난봉꾼 이었다. 그런데도 욕심은

가문을 살리고자가 아니라 종부자리를 고정화 시켜 놓고자 이웃집 아줌마를 동원하기도 했다. 참 양심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나는 유명 고 미술교사가 운영하는 화실에 엄마 모르게 일주일에 한번 씩 다녔다. 방학 때는 물론 화실에 거의 시간을 할애했다.

결국 어느 날 들통이 났다.

중학교 시절, 교무주임 선생님께서 모 예술고에 특별전형으로 입학절차 밟을 수 있게 해 주셨다.

부모님은 투사처럼 일절 사양이 아니라 결사 반대였다.

그 선생님은 영국혼혈 영어선생님이셨고 크리스천 이었다. 부모님의 항의반발 유사한 답변을 받고 무안해 하셨다.

 

그리고 고교시절 교내 행사와 교외 행사는 아마도 거의 즐거운 기억의 행사였다.

아직까지 감사한 그 시절 교장선생님은 정말 내 활동영역에 관하여 대견해 하셨다.

교내 미술교사도 법대를 나오셔서 미술의 꿈을 접지 못하시고 결국 미술 교사가 되셨다.

 

엄마에게 적발 당한 후로는 거의 반과 후 교내서 그림 연습을 해 왔다.

용돈에 관하여서는 필요에 따라 잘 주셨기에 재료들을 사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화방에 들릴 때 마다 서점을 가곤 했다. 학교 도서관 책들은 읽을거리가 별로 없었다.

책을 읽는 즐거움과 팝음악을 들으며 혼자 그리는 그림은 늘 행복했다.

초등학교 한 해 선배였던 H는 가까운 대학에 다녔고 대학 축제가 오면 어김없이 전시회를 했다.

그리고 나는 늘 찬조 작품을 제출 했다.  그에 따른 기억과 해프닝도 많지만 생략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고2였던 것 같다.

중학생 한 명이 작업하는 우리 반 교실로 들어 왔다.

어느 선생님께서 부르시니 따라 오란다.

그리던 붓을 내려놓고 그 학생을 따라 갔다.

콜타르를 바른 오래된 건물로 가고 있었다.

컴컴한 교실 안에 작은 합판 칸막이로 꾸며진 방을 들어 서 보니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서예와 동양화 작업실이 있었다.

그동안 학교 안에서 그림을 그리고 시험공부도 하며 늘 교내 있었건만, 상상조차 못할 작업실이 거기 있었다.

그 분은 내가 수업 받는 국어 선생님이셨다.

초임 발령을 받고 오신 분인데 그저 육안 상으로 많은 것을 한다는 것만을 알았지 상세하게는 몰랐다.

사실, 교내 싱글 남자교사들 네 명과 모두 친했다.

너무 친하다 보니 친구 같은 입장이라고 보면 건방지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혼자 늘 남아 있다가 보면 그들과 자주 만나고 대화 하고 일요일 낚시도 가고 여행도 가고, 그러다 교장선생님이 한 말씀 하셔서

외부로 나도는 것을 하지 않았다.

남여 싱글 교사들은 초임들이라서 그런지 대학동기들도 있고 해서 더러 신경전 내지는 말 싸움까지 곧 잘한다.

그런걸 보다 보면 그들이 아이들 같다는 생각을 한시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런 그들과는 달리 국어 선생님은 언제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을 하신 것으로 안다.

후배 여학생들의 우상이기도 했기에......,

 

아무튼, 그 선생님은 당신의 고교 후배인 모 미술대학 재학생을 소개 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사(師)사(事)를 받았는데 아이들 같은 싱글 교사들이 한 마디씩 던졌다.

이래저래 시간은 지나고 나는 그에게 사(師)사(事)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교내 눈의 초점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나를 감시를 했는지 반대론이 지배적이었다.

방학이 끝나기 전 재학생은 갔다.

시간은 지난 시절로 조용하게 되돌아 갔다.

 

중요한건, 내가 국어 시험을 치룰 때, 선생님은 앞면 50점은 교과서 출제 문제였고,

뒷면 50점 문제는 시를 쓰는 것이었다.

나는 지리 과목은 언제나 좋아해서 잘 했다. 그런데 의외로 국어가 어려웠던 그 때,

그 글짓기 때문에 나는 살판이 났었다. 늘 50점을 받아 냈다.

한 친구가 뽀로통해서 심각하게 이 문제를 논의 해 왔다.

그 친구는 모든 과목에서 뛰어난 아이었다. 특히 주입식 과목에서......,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타향에서 나는 그 선생님을 만났다.

늘 기억에서 지울 수 없었던 고마우신 그 선생님을 만났다.

하여, 세상은 그리 좁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였다.

 

상호 그다지 친근하지는 않았지만 제자를 위한 시각만큼은

깊은 곳에서 부터 우러나온 측은이셨다.

 

겸손하시면서 예술의 혼을 온전히 입으신 스승님이

이제, 한국문단의 중추적 역할이 되 시길 소원 해 본다.

 

나는 지금 바쁘다는 핑계로 직접 찾아뵙지는 못하고 있지만

마음을 억압하는 일들이 소통되면 나의 고마우신 스승님을 뵈올 것이다.

그동안 항상 건안하시길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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