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호 종이강에 그린 詩]
인간의 본성-손동욱
그 후로 우리 인간들에겐 그 죄가 유산으로 남겨졌습니다. 짓지도 않고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원죄라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기가 세상에 태어날때, 그토록 울어재끼나 봅니다. 아마도 이러한 원죄가 없었다면, 꺄르륵!~ 웃으며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선하지만 나쁜 환경이나 그릇된 욕망 때문에 악하게 된다고 주장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
아니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악하지만, 도덕적 수양을 통해야만 선해질 수 있고,
수양은 교육을 통한 후천적 습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이 있습니다.
이 두 학설은 마치, 표리 관계로 유지되고 있는 동전의 양면처럼 모두 옳을 수도, 모두 틀릴 수도 있는 판단이라고 봅니다.
아무튼 위 두 학설은 모두가 사람의 본성은 어린나이 부터 일찍히 생활방식이나, 환경이나, 교육에 의해 방향이 정해진다는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본성은 일정하지 않고 마치 물과 같다 여기기 때문입니다. 동쪽으로 터트리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트리면 서쪽으로 흐르는 물과 같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나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해 봤습니다. 흙담은 비바람에 녹아 부숴졌을때가 원래의 본질이고, 얼음은 녹아서 질척한 물이 되었을때가 얼었을때보다 더 본질적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본질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의 원래 모습을 끄집어 내어 놓고, 철저하게 해부를 해봤습니다. 과연, 나는 본 바탕을 잘 살려왔던가? 하고 말입니다.
문득~ 뜰 안 마당에 심겨진 나무를 봤습니다. 소나무는 소나무로서 좋아야하고, 버드나무는 버드나무로서 좋아야 하고, 대나무는 대나무로서 좋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태어난 본 바탕을 잘 살려야만 소나무는 소나무로 성장하게 되고, 대나무는 똑바로 펴지고, 버드나무는 낭창낭창 날씬하게 되는 것 이였습니다.
어디까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백마는 매일 목욕하지 않는데도 여전하게 희고, 까마귀는 매일 검정칠을 하지 않건만 여전하게 검습니다.
이와같이 흑,백이나 선악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니 이를 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옛말에 썩은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고, 진흙 담에는 덧칠을 할 수 없다 했습니다. 난쟁이가 산 꼭대기위에 선다해서 키가 커지는것 아니라고 했습니다.
거인이 우물속에서도 자기 키는 그대로 였다고 하면서... 인간의 본성은 어쩔수 없는것이라, 자포자기 하여 살아왔지만,
사실 인간은 그 좁은 본성 속에서 사랑과 미움이란 이중의 감정을 필요로 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밝은 낮이 필요하듯, 어두운 밤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모두가 하나로 조화롭게 어우러질때가 가장 이상적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신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뜻밖의 긴급성이 요구 될때에는 정상적인 과정을 건너뛰고, 건전한 한계를 훨씬 넘어서
상황에 맞는 특수한 방향으로 강요 되어질수 있는가 봅니다. 그러나 그 역작용에는 반드시 댓가가 뒤 따르고 그 결과로 생기는 환멸은
도덕적 퇴폐라는 황량한 결과까지 남기게 되는것입니다. 바로 이런 뜻밖의, 긴급함과, 특수한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는자 만이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시향을 창가에두고 > 종이강에 그린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16호 종이강에 그린 詩]참사랑 씨알 -우룡스님 (0) | 2012.06.19 |
---|---|
[제113호 종이강에 그린 詩]인격형성 배양인 환경 (0) | 2012.06.13 |
[제112호 종이강에 그린 詩]중년의 나이 -손동욱 (0) | 2012.06.13 |
이 땅에 머무름은 -변성래 (0) | 2012.06.09 |
[제110호 종이강에 그린 詩]얼굴 -성기조 (0) | 2012.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