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인문학 스프-싸움의 기술 ⑲ - 살아서 돌아오는 주인공

은빛강 2012. 9. 19. 22:26

 

인문학 스프
싸움의 기술 ⑲ - 살아서 돌아오는 주인공

싸움에는 여러 가지 ‘판’이 있습니다. ‘이야기판’도 사실은 볼만한 싸움판입니다. 그 안에 역사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적어도 집단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미래’를 내포합니다. 이야기의 변화는 언제나 시대를 앞서 가기 때문에 ‘이야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금 우리가 가진 ‘이야기판’의 실태를 살펴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른 ...
것은 몰라도 ‘집단의 선택’ 같은 것은 쉽게 점칠 수 있습니다. 일례로, ‘일본은 없다’와 ‘서편제’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이야기가 동시에 유행한다면 그 시절 그런 이야기판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대통령에 뽑힌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알만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령 첫사랑 코드가 갑자기 이야기판을 휩쓴다고 한다면 ‘첫사랑’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또 대선에서 승리할 공산이 클 것입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어쨌든 이야기판을 통한 ‘예측’은 재미 이상의 관심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그런 관심의 연장선에서 아동문학과 관련된 ‘싸움의 기술’을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아동 문학의 기본 패턴은 회귀적 여행입니다. 아이들 이야기의 기본 플롯은 일반적으로 <집―떠남―모험―집>이라는 공식을 보여줍니다. 이 패턴은 꼭 모험(탐색)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광범위하게 아이들 이야기에 수용됩니다. 거의 일반적인 패턴입니다. 아이들 이야기의 주인공은 반드시 살아 돌아옵니다. 아이들 이야기뿐만이 아닙니다. 시련을 겪고 살아 돌아오는 주인공은 옛날이야기 속에서도 흔히 발견됩니다. 단원 신화의 패턴이 <분리―시련― 귀환>이라는 점이 그것을 증명합니다(굳이 탐색영웅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마늘과 쑥을 먹고 굴속에서 삼칠일 동안 격리된 후 인간이 되는 웅녀를 연상해도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패턴은 인류의 어떤 근원적인 소망(변신 모티프?)과도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영웅 대망론이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메시아 사상이라고나 할까요? 무언가 우리가 안 보는 사이에(격리) 크게 변한 이가(시련 극복) 다시 우리에게 돌아와 우리를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심성 같은 게 반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어린이들이 보는 그림책에서부터 성인 취향의 심리소설에 이르기까지 이 패턴은 꾸준히, 다른 수준, 다른 양태를 보이며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등장인물들이 위험과 시련 속에서 모험의 세계를 일주하고 안전한 ‘집’으로 되돌아오는 패턴을 가장 싫어하는 것이 이른바 근대문학, 그 중에서도 리얼리즘 소설 작가들일 것입니다. 리얼리즘 입장에 서서 보면 그런 패턴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귀환의 약속’은 신나는 모험을 제대로 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고작 멜로드라마에 그칠 뿐입니다. 그래서 폄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종래의 회귀적 패턴(분리-시련-귀환) 대신에, 한 번 출발하면 출발지와는 전혀 다른 목적지에 도달하는 선형적(線型的) 패턴을 즐겨 사용합니다. 그게 현실이라고 여깁니다. 철통같은 아동문학의 아성에도 그러한 변화가 19세기 말에 이르러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인 아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은 그 때가 거의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선형적 패턴의 아동 문학에서 ‘주인공의 죽음’이 행복한 결말인지 불행한 결말인지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죽음은 선과 악이 그렇듯이 언제나 이중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 한 작가가 자신의 주인공을(우리 곁으로 다시 데려오지 않고) ‘다른 세계에 남겨둔 채’ 이야기를 끝낸다는 방식이 굉장히 낯선 코드였던 당시에는 더욱 그랬을 공산이 큽니다.

리얼리즘 소설은 근대의 총아입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근대의 맹아를 싹틔우며 세계를 변화사킬 때 등장한 ‘웅녀’입니다. 그 이전의 ‘곰의 탈’을 벗은 ‘현실적 이야기들’은 숫자에 밝은 부르조아들의 세계관을 크게 만족시킵니다. 당연히 ‘불패의 진리’ 취급(대접?)을 받습니다. 그들이 즐겨 사용한 선형적 코드 역시 문학적으로 훨씬 더 매력적인 패턴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때는 그럴 만했습니다. 세계가 더 밝은 쪽으로 나아갈 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조는 무너지고 민권은 날로 신장되었습니다. 작가는 물론이고 독자들도 작가의 편에 서서 전적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먼 길을 떠나는(다시 돌아올 기약 없는) 주인공들을 배웅했습니다. 당연한 결론이지만, 이미 정해진 결론을 가진 어린이 책들은 아이들의 상상력과 자유로운 사고력을 구속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열린 결말이 예찬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르조아가 세계를 지배하고 그들의 자본주의가 다시 그들 주인들의 삶을 지배하면서 상황은 예기치 않게 암전(暗轉)합니다. 세계는 더 밝은 쪽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는 각성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날로 희망이 사라져가는 걸 봐야 했습니다. 당연히, 그 옛날 굶주린 민초들이 기아와 살육의 공포 속에서, 희망 없는 삶을 위로하기 위해 지어내던 끔찍하고 야비한 그로테스크 민담들이 다시 횡행하기 시작했습니다(리얼리즘 소설의 붕괴와 아이들이 즐겨 지어내는 패러디 동화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상은, 마리아 니콜라예바(김서정), 『용의 아이들』, 124쪽 이하의 내용을 참조하되 제 글의 취지에 맞게 일부 수정, 차용한 것입니다)

요즈음, 연말 대선을 앞두고 두 이야기가, 두 개의 코드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의 회귀적 패턴과 선형적 패턴이 그것입니다. 한 쪽에서는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분리-시련>을 거치고 당당히 살아서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이야기는 이른바 ‘회귀적 패턴’이라는 겁니다. 당연히 다른 한 쪽에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들 이야기의 주인공에게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처럼, 모든 시련이나 모험이 하나의 꿈(악몽?)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여기면서 상대 쪽 주인공은 결국 리얼리즘의 가혹한 검증 아래서 어쩔 수 없이 노상에서 비명횡사하고 말 것이라고 여깁니다. 서로 상대방의 이야기가 그렇게 끝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서로 그렇게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히 ‘적벽대전’입니다. 한쪽에서는 세력을 믿고 한쪽에서는 강물에 의지합니다. 어디서 ‘동남풍’이라도 불어오지 않으면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현실은 어떤지 몰라도, 이야기판에서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세상이 밝아진다고 느끼면, 그래서 주인공 혼자서도 늠름하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면 독자들은 선형적 패턴을 선호합니다. 리얼리즘의 검증을 달게 수용합니다. 주인공에게 다가올 미래는 시련이 아니라 모험으로 간주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이 더 어두워지고 있다고 느끼면, 그래서 주인공 혼자서는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지면, 그때는 독자들이 회귀적 서사구조를 선택합니다. 어두운 세상에는 반드시 영웅이 필요한데, 속악(俗惡)에 의해 주인공이 비명횡사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독자들이 나서서 주인공을 구해 와야 합니다. 리얼리즘의 검증은 그래서 도로(허사)가 됩니다. 누구도 그 검증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미 주인공에게는 ‘귀환의 약속’이 주어져 있는데, 그것이 이야기의 법칙인데 웬 성화냐는 겁니다. 오히려 분노만 키우게 됩니다. 그걸 아는 게 중요하지 싶습니다.
어쨌든(또 어쨌든?) 대선도 대선이지만, 우리 아이들이 서양 민담의 초기 판본에 환호하고 그것을 모방해 너도 나도 끔직한 이야기를 지어서 돌려보는 까닭도 우리 어른들이 한 번 곰곰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그 둘이 하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진은 마귀든 자에게서 마귀를 쫒아내는 예수. 왜관 가실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