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인문학 스프-싸움의 기술㉛ - 군자불기(君子不器)

은빛강 2012. 9. 19. 22:21

 

인문학 스프
싸움의 기술㉛ - 군자불기(君子不器)

 

 


몇 년 전 일입니다. 문예창작과 대학원 과정에 출강을 나간 적이 있습니다. 연구년을 나가시는 교수님 대타(代打)로 한 학기 떠맡은 것이었습니다. 소설창작을 해본지도 오래되었고, 남의 소설 읽어본지도 오래되어서 그저 ‘배우는 기분’으로 강의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습작 발표와 상호 강평이 제 기대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창작 수준도 수준이지만, 오로지 문장...
이 되고 안 되고만을 따지는 학생들의 강평 태도가 저를 좀 당황스럽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지엽말단적인 데에만 관심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쭈욱 배워왔다고 합니다. 주제의 발굴이나 서사의 기술(技術)은 애당초 언감생심이라는 거였습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들은 좀 베껴 써봤냐고 물었더니 ‘그런 게 왜 필요하냐’는 반응이었습니다. 별 수 없이 한 학기 그렇게 문장 실습만 하고 말았습니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청년 시절에 소설이라는 것을 쓰겠다고 작심한 뒤 지금까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생각이 정리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저 ‘닥치는 대로’ 써왔습니다(지금도 그렇습니다). 다만 어느 순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는 듯한 느낌’이 한 번쯤 있기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는 글쓰기가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아마,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좀 알게 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동안 벗으면 죽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무겁고 답답한, 철가면(鐵假面) 하나가 툭 떨어지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그 순간의 희열은 참 대단했습니다. 이십대 중반에 찾아온 그 계시 아닌 계시 덕분에 지금껏 시골 글쟁이로나마 죽지 않고(?) 연명할 수가 있었습니다.

브루스 맥코미스키(김미란)가 지은 『사회 과정 중심 글쓰기 : 작문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책을 읽다 보니 문득 그 옛날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답답하고 지루했던 문예창작 강의 시간도 함께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공자님이 말씀하신 ‘군자불기’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얼핏, 글쓰기 공부에도 그 말씀이 꽤나 유효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子曰 君子不器 (『論語』 爲政)

* The Master said, "The accomplished scholar is not a utensil."

* 군자(君子)는 일정(一定)한 용도(用途)로 쓰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한 가지 재능(才能)에만 얽매이지 않고 두루 살피고 원만(圓滿)해야 한다는 말.

* 바람직한 지식인은 스페셜리스트이면서 동시에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말.

* 군자는 한낱 도구적인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바람직한 인간 존재는 덕과 인, 지식과 실천력을 겸비한, 자목적적(自目的的)인 통일(통합)체라야 한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군자불기’라는 말의 뜻은 대체로 위의 설명들과 같습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올수록 설명이 좀더 자세히 이루어집니다. ‘자목적적인 통일(통합)적 존재’라는 말은 제가 한 번 붙여본 것입니다만, 현재 저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군자불기’에 가장 접근되어 있는 해석인 것 같습니다. ‘도구(器)’라는 말을 무엇의 ‘수단(적 존재)’이라고 본 해석입니다. 군자(이상적 인간 존재)는 그것(수단적 존재성)을 뛰어넘어 스스로가 존재의 목적이 되는 경지를 지향해야 한다고 공자님이 가르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한 가지 전문 기술이나 학식에 치중하지 않고 만사형통(萬事亨通), 두루두루 통하는 인간이 되기를 공자님이 강조하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무리 형통해도, 그것 역시 결국은 또 다른 ‘기(器)’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쉽지, ‘자목적적 통일(통합)체’가 어떤 것인지 자세히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명해 보라면 저도 속수무책(束手無策), 달리 더 갖다 붙일 말이 없습니다. 공자님도 비유로 표현하신 것을 제가 어떻게 감히 직설(直說), 직서(直敍)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글쓰기 공부에 관련해서 몇 마디 부언(附言) 하는 일은 가능하지 싶습니다. 이를테면 ‘군자불기 견물생심 글쓰기론’ 같은 것은 가능하지 싶습니다. 스스로의 삶이 자목적적이 될 때 ‘무엇을 쓸 것인가’는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 정도는, 그리고 그 세부적인 경험적 사례에 관해서는 몇 마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하 다음에 계속)

사진은 수백당(守白堂) 툇마루 전경. 추사(노완) 김정희 선생의 필체인 ‘쾌활(快活)’이라는 편액이 인상적이다. 앞쪽에 크게 써서 내건 ‘守白’과 뒤쪽에 문신처럼 새긴 ‘快活’의 상호텍스트성이 지나가는 과객(?)의 발걸음을 한참동안 멈추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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