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시인 임보 교수님 방

<운포(雲浦) 가는 길> [仙詩]

은빛강 2012. 11. 29. 06:33

<운포(雲浦) 가는 길> [仙詩]

자하동(紫霞洞)에서 운포(雲浦)라는 포구를 찾아
몇 날 며칠을 걷고 있던 때다
어느 한 강가에 이르렀더니
아름드리 오동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그 그늘 밑에 네댓 사람이 널부러져들 있다
아마 길을 가다 잠시 쉬고 있는 나그네들인가 보다
나도 땀을 식히려고 오동 그늘 아래 발을 들여 놓
았더니
...
“운포(雲浦)까지는 아직 둬 천리나 됩니다”
하고 한 사내가 자리를 뜨면서 내 귀에다 일러 주고
간다

내 마음을 읽어 미리 대답을 던지는 솜씨다
내 눈이 휘동글해지자 또 한 사내가 자리를 뜨면서
“고기는 많은데 먹을 게 없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가던 자가 고개를 돌려 오동나무 가지 위를 눈짓한

몰총새 한 마리가 강물을 내려다보며 우짖고 있다
옳거니 저 자는 날짐승의 소리에도 귀가 열려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러자 빙긋이 웃고만 있던 흰 눈썹의 영감이
“이분은 푸나무의 소리도 잘 듣습니다”
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덥석부리 사내를 턱질한다
허자 덥석부리가 슬며시 눈을 뜨더니
“돌의 마음을 읽는 분도 있답니다”
하고 눈썹 영감을 바라다보는 게 아닌가

참 신묘한 일이로다
어떤 자는 사람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고
어떤 자는 짐승들의 소리에도 밝고
어떤 자는 초목들의 몸짓도 읽을 수 있고
또 어떤 자는 생명이 없는 돌들의 속내까지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

내가 부러워하는 눈초리로 이들을 보고 있자
한 귀퉁이에 말없이 앉아 있던 꾀죄죄한 늙은이 하
나가
자리를 뜨면서 던지는 말이다

“그 많은 소리들을 듣고 시끄러워 어찌들 지내나?
나는 내 소리만 들어도 귀찮은데”
하며 귀를 여는 일보다
귀를 닫는 일이 더 어렵다고 투덜거리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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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위의 다락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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