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시인 임보 교수님 방

<생명시학서설(生命詩學序說)>

은빛강 2012. 11. 29. 06:36

<생명시학서설(生命詩學序說)>

생명 작용, 즉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끊임없는 자아확대(自我擴大)의 움직임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객체(客體)의 주체화(主體化) 활동, 곧 생명체 속에 세계성을 끌어 모아 축적해 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생명체의 원초적 본능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금방 수긍이 갈 것이다. 가장 원초적 본능은 식욕(食慾)과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이다.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체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생명체 내부로 끌어들이는 행위다. 먹는다는 것은 객체의 주체화 작용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동작이다. 호흡(呼吸)도 주체화 작용의 하나다. 식물의 탄소동화작용처럼 동물들도 태양의 햇볕과 우주 공간의 여러 요소들을 체내로 끌어들여 자아화(自我化)한다. 이처럼 생명체는 세계가...
지닌 요소들을 그의 몸 속에 집약시킨다. 곧 세계성의 축적을 꾀한다. 우리의 몸은 전 우주적 요소들의 총화에 의해 형성된 신비로운 존재다.

생명 작용의 정지―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체의 몸, 곧 육신의 확산을 의미한다. 몸을 구성했던 모든 요소들이 이제는 몸을 떠나 그것들이 왔었던 우주 공간 속으로 흩어져 되돌아가는 환원을 뜻한다. 흩어지는 몸은 우주 속에 스미고 스며 장차 우주를 가득 채운다. 그러므로 한 생명체의 몸은 우주 공간의 모든 요소들이 집약되었다 흩어지는 하나의 교차점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다.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 곧 양성(兩性)의 결합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종족 번식의 이 방식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 역시 세계성 확장에 그 의미가 있다. 양성의 결합은 두 세계의 통합을 의미한다. 자식은 부모의 두 세계성을 통합하여 공유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조상들의 세계성을 통합하여 내포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신비스럽기 이를 데 없다. 우리는 두 부모의 세계성뿐만 아니라 네 조부모, 여덟 고조부모들의 세계성을 아울러 통합 공유하고 있다. 600년 전 그러니까 20세대 전만 거슬러 올라가 보자.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나 하나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고 있었는가. 2의 20승, 곧 100만 명이 넘는다. 이들 중 어느 한 분만 없었어도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생명체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은 실로 기적에 가까운 놀라운 통합 속에서 가능하다.

그런데 생명의 역사, 생명의 끈은 몇 백 년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면 창조주에까지 이른다. 따라서 한 생명 속에는 과거 전 조상의 세계성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전 과거 조상들의 집약체며 수렴점이다.

또한 미래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두 자녀를 갖게 되고, 그 자녀들이 또한 두 자녀씩을 갖게 된다면 600년 후에 내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의 수효가 100만 명이 넘게 된다. 인류의 미래가 얼마쯤 지속될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 지상의 모든 인류들의 혈관 속에 내 피가 흐르게 된다. 말하자면 미래 인류들은 ‘나’로부터 비롯된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 인류들의 모습은 달라진다. 나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성스러운 것인가. 나는 전 과거 인류의 집합이면서 전 미래 인류의 출발점에 있다. 나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하나의 교차점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다.

생명체가 지닌 모든 감각 기관들(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은 주체화의 대상인 객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즉 먹이와 이성을 찾는데 필요한 탐색용 레이더들이다. 생명체의 모든 활동 역시 주체화, 곧 자기 확대의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문화 활동도 이에 근거하고 있다. 정치 활동은 타인들에 대한 지배욕에서 비롯된 것이요, 경제 활동은 물질들에 대한 소유욕에서 출발한다. 자연과학도 자아 확대를 위한 객체들의 탐색 작업에 근거하고 있다. 종교도 자아를 내세(來世)에로까지 확대하고자 하는 의지에 뿌리하고 있다.
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의 모든 언술 행위 역시 궁극적으로는 자아 확대를 위한 욕망의 표현이다. 문학은 자아 확대, 곧 대상 성취의 욕망이 기술적으로 표현된 언술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더 간단히 말하면 문학이란 인간의 욕망을 기술적으로 표현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서경(書經)의 저 유명한 <詩言志>의 ‘지(志)’도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얻고자 하는 소망’의 의미로 파악된다. 그런데 문제의 관건은 ‘기술적’이라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시, 소설, 희곡 등의 장르를 갈라놓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면 시가 되게 하는 기술적인 요인들, 곧 시적 장치란 어떤 것인가. 나는 시적 장치의 특성을 우선 ‘감춤’과 ‘불림’과 ‘꾸밈’이라고 지적해 본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은폐 지향성’과 ‘과장 지향성’ 그리고 ‘심미 지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상징(象徵), 우의(寓意), 전이(轉移) 등의 기법으로 나타나고 중자는 비유(比喩), 의인(擬人), 역설(逆說) 등의 수사에서 드러나며, 후자는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대구(對句)나 대조(對照) 그리고 운율(韻律) 장치로 표현된다.
나는 이 세 가지 시적 장치의 특성을 포괄하여 ‘엄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시는 인간의 소망이 엄살스럽게 표현된 짧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소망하는 내용의 품질과 엄살을 부리는 격조에 따라 시의 품격이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격이 있는 시가 어려운 것은 소망에 대한 단순한 기술적 언술이라는 한계를 넘어 구도자적 정신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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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살의 시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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