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시인 임보 교수님 방

<시와 제목>

은빛강 2012. 11. 29. 06:45

<시와 제목>

글에서의 제목은 독자의 시선을 맨 처음 붙들어 글 속으로 안내하는 간판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대개의 제목들은 독자로 하여금 글의 내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도록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다. 논리적인 내용의 글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데 문학 작품인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다루고자 하는 주된 소재를 제목으로 삼거나 말하고자 하는 주된 생각을 제목으로 설정하여 글의 내용을 넌지시 짐작하게도 한다. 그렇지만 문학 작품의 제목들은 대체로 글의 내용을 직설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암시 혹은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특히 詩인 경우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에서의 제목은 점포의 간판처럼 선명한 것이 아니라 막이 오르기 전 무대에 드리워진 반투명의 장막과도 ...
같다. 그것은 독자들의 궁금증을 빨리 풀어 주는 해소제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궁금증을 오히려 심화시키면서 흥미로운 갈등을 맛보게 하는 미적 장치로 설정된다. 시는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 아니라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시의 제목이 시를 읽어보기도 전에 내용을 짐작할 수 있도록 붙여졌다면 그것처럼 싱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시에서의 제목은 내용을 설명하는 간판이어서는 곤란하다. 시의 제목은 시행(詩行)과 마찬가지로 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작용해야 한다. 말하자면 시의 제목도 시의 다른 요소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절대적인 부분으로 존재하도록 해야 한다. 그 제목이 아니면 그 작품의 그러한 구조는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이상적인 제목은 독자가 그 시의 마지막 행을 읽을 때까지 독자의 의식 속에 계속 다양한 의미망을 형성하면서 탄력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다음에 왕유(王維)의 <녹채(鹿柴)>라는 절구를 예로 보도록 하자.

空山不見人** 맑은 산 속 사람은 보이지 않고
但聞人語響 ** 두런두런 말소리만 들려 올 뿐
返景入深林 ** 저녁볕은 깊은 숲에 스며들어
復照靑苔上 ** 파란 이끼 위를 다시 비추고 있네

거금 천이백여 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작자가 처음부터 이 작품에 제목을 달았는지 아니면 후세의 어떤 이가 그렇게 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작품은 ‘鹿柴(녹채)’라는 그 제목으로 하여 의부진(意不盡)의 깊이를 간직하게 된다. ‘鹿柴’를 고유명사[地名]로 해석하려는 이도 있기는 하나 그렇게 되면 이 시의 맛은 반감이 되고 만다. ‘鹿柴’는 글자 그대로 ‘사슴 울타리’의 의미로 보아야 멋이 살아난다.
도대체 이 시의 제목을 어찌해서 ‘사슴 울타리’로 붙였단 말인가. 겉으로 보기엔 깊은 숲 속의 맑고 조용한 저녁나절의 자연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다. 사슴은커녕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웬 사슴 울타리란 말인가. 제목이 시의 내용을 설명한다고 기대하는 이들은 아마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시를 읽을 것이다. 그러나 제목도 시의 한 행처럼 시의 내용을 형성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깊은 산 숲 속에 햇볕이 든 작은 공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 빈터에 몇 이랑의 조그만 채마밭이 만들어져 있다. 아마 무나 배추 등속의 채소를 심었던 곳인가 보다. 그 채소밭가에 나뭇가지를 듬성듬성 엮어 만든 기울어진 울타리가 있다. 주인도 먹기 전에 사슴이 자주 찾아와 뜯어먹으니 이를 말려 보자는 것이었으리라. 저 밭의 주인은 누구일까, 아마 이 근처 산 속 어딘가에 움막이라도 치고 살 것이다. 작품 속에 나오는 두런거리는 말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그는 지금 약초라도 캐면서 혼자 시를 읊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목 ‘鹿柴’는 바로 이러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鹿柴’라는 제목이 붙어 있지 않다면 이 작품은 한갓 깊은 산 속의 자연을 노래한 작품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제목으로 인하여 자연을 노래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은자(隱者)의 깨끗한 삶을 노래한 작품으로 크게 달라진다. 제목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작품의 내용을 결정하는지 알 일이다.

石膏(석고)를 뒤집어 쓴 얼굴은
어두운 晝間(주간).
旱魃(한발)을 만난 구름일수록
움직이는 나의 하루살이떼들의 市場(시장).
짙은 연기가 나는 뒷간.
주검 一步直前(일보직전)에 無辜(무고)한 마네킹들이 化粧(화장)한 陳列窓(진열창).
死産(사산).
소리 나지 않는 完璧(완벽).

金宗三의 <十二音階(십이음계)의 層層臺(층층대)>라는 작품이다. 내용과 제목이 다 적잖이 난해하다. 전체가 8행으로 되어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6개의 정황들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각 정황들은 마침표에 의해 구분되는데, 정황과 정황 들은 아무런 유기적 관계도 없다. 말하자면 이질적인 정황들이 병치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각 정황들은 모순 구조로 되어 있다. 낯[밝음]과 낮[어둠], 구름[天上]과 시장[地上], 연기[炊事]와 뒷간[排泄], 마네킹[人間]과 진열창[社會], 출생과 사망, 구상[완전한 벽]과 추상[모자람이 없음] 등의 이율배반적 모순 구조들이다. 부조리한 세상의 점묘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왜 제목을 ‘12음계의 층층대’라고 했을까? ‘음계’는 즐거움을 ‘층층대’는 괴로움을 환기시키는 대상이다. 따라서 이 제목 역시 안온(安穩)과 역경(逆境)의 모순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12’는 6의 배수이기도 하지만 ‘多’의 의미로 파악된다. 이 제목은 세상을 고뇌 일변도의 것으로 부정만 하지 않으려는 작자의 따스한 휴머니즘을 아울러 담고 있다.

그동안의 사정들을 살펴보건대 시에 제목을 붙이는 양상도 다양하다. 소재를, 배경을, 주제를 혹은 작품의 한 부분을 제목으로 삼기도 한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일 경우도 있으리라. 그러나 생각이 깊은 시인들은 그냥 쉽게 제목을 달지 않는다. 그 제목이 작품을 구성하는 기능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도록 설정한다. 시에 제목을 붙이는 일은 상품에 꼬리표를 다는 일과는 다르다. 천편일률적으로 그냥 적당히 할 일이 아니다. 시는 가장 정제된 문학 양식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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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살의 시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