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문학인의 방

[스크랩] 해후邂逅

은빛강 2010. 3. 12. 21:51

   < 수필 > 

                                                     해후邂逅

                                                                                      조순제

 

 나에게는 소중한 친구 한 분이 있다. 바로 시인 L씨다.

 누구나 벗을 꼽으라면 수없이 나열할 수도 있고, 절친한 붕우 한두 명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허나,나에게는 사정이 좀 남다르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흘린 동전처럼, 그를  잃은 것이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관심이 소홀할 리없고, 우정의 소통도 원활할 터인데, 어찌 동전 잃듯 하였는지는 당시 혁명을 두 번이나 치른 시대적 상황이나 경제적 핍박등 급변한 환경 변화에 굳이 원인을 돌리고 싶다.

 어제, R교수의 주선으로 그와 45년 만에 기적같은 통화가 가능하였다. 요즈음같이 인터넷 만능시대에,하물며 외국도 아닌 국내 거주자를 무슨 범제자 수배하듯 수사망을 가동할 능력도 없는 주제에다, 컴맹에서 겨우 탈출한 독수리 타법으로 갈래도 복잡한 시인협회 조회를 시도해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우리는 서슬이 시퍼렇던 군사독재시대에 고등군사반 교육과정에서 처음 만났다. 용모도 준수하고, 인품이 청아한 그를 대하는 순간, 나는 구애라도 하고싶은 심정이었다. 때마침 소설가 C씨가 우리와 합류하여 문학을 논하고, 인생을 교감하면서 삭막한 피교육 분위기를 극복할 수있었다. 나는 그들의 그늘 밑에서 비로소 시와 소설에 개안을 한 셈이 된다.

 졸업 후, 각자 다른 임지로 흩어져 간간이 교통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를 두번 째의 군사혁명이 지나가고 수많은 가을이 지나갔다. 서로 소통이 힘든 군 통신망에도 원인은 있었다. 그와 나사이의 통로에도 해마다  낙엽이 쌓이고 사활이 걸린 생의 시련도 스쳐갔다.

 자유문학 출신인 그는 한국문단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와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전무이사를 역임 하였고,뛰어난 영문 번역가로 140여편의 현대 한국서정시를 영역한 선집을 출간하였으며, 한국소설과 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시나리오, 에세이,정치, 문화평론 등을 번역하였다.

 L시인의 시세계는 오묘한 시적 감성과, 친근한 체험으로 접목된 목소리로, 낭만적이고 모더니즘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철저한 휴머니스트다.

 "그사람 이민 갔는데?!"

  평소 교분이 있던 문인 한 분이 L씨의 소식을 묻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잘은 모르겠고, 풍문에 전해 들었어"

 나는 앞이 캄캄하였다. 에잇 몹쓸 인사, 뭐이 그리 못견디어 조국을  떠나, 나도 좀 데려가지. 한 쪽 팔을 잃은 듯한 상실감에 마음에 큰 공혈이 뚫린 형국이었다. 며칠동안 그외 이별로 인한 충격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며 그래, 가서 잘 사시오. 생전에 는 만나기 힘들겠군. 체념과 망각이 혼효된 심정 속에 차츰 그의 영상이 지워져갈 무렵, R교수로부터 뜻밖에 그의  전화번호를 통보받은 것이었다.

 나는 그와의 약속장소인 한국 현대문학관 정문 입구로 숨차게 달려갔다. 그리고 뜨거운 해후로 내심 울먹였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대로변이 아니었다면 부등켜안고 법석을 떨었을 것이다. 살아 있으면 이런 수도 있구먼. L시인은 하얗게 웃었다. 그도 나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문학이라는 병균을 심어준 장본인이 자신임을 늘 미안해 한 그는 나의 등단을 목말라 하면서, 차라리 소설공부가 여의치 않으면 생업에라도 열중하였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품고 있는 듯하였다. 그의 인도로 문학관을 견학하였는데, 시인 이경희씨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문학박물관인 관내는 문학도서2000여권, 육필원고1000여점, 사진자료1500여점 외 문학잡지, 연구논문집 등 이인직의 "혈의 누"를 시작으로 한국현대문학을 한 눈에 볼 수있어,이 나라 문학의 산실이요, 요람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이상李箱 육필원고가 한자漢字가 섞인 일본어로 기록돼 있었다. 1906년 부터 소장된 작품들이 연도별로 일목요연하게 진열되어있고, 이효석,채만식,정지용, 한용운,이태준,김유정,윤동주, 이상....한국문단의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그들 나름의 시대적 고난을 얼굴에 숨긴 채 수굿이 굽어보고 있었다.견학을 마치고 나오는데, 문학관 관련 DVD와 연관서적 등 푸짐한 선물까지 주신 이경희 시인께 감사 드리고 우리는 문학관을 나왔다.

 "이젠 헤어지지 맙시다."

 "좋으나  궂으나 붙어 살자고 "  

 벗겨진 대머리를 베레모로 비딱하니 가린 노신사, 그가 탄 전동차가  아득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었다.                                                                                    

 

  

 

  

 

출처 : 土香
글쓴이 : 대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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