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詩하늘 詩편지

뒤란의 봄---박 후 기

은빛강 2010. 4. 18. 17:17

많은 것들을 유실한 무기력한 오후, 존재감의 느낌 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날들

의무감으로 마주한 이들과 의미없는 웃음을 여기 저기 흘리고 마지막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 와

마취제를 주입한듯 육신을 허무하게 팽개친 발치에 삶이 쇠뭉치로 달려 있었다.

버리고 싶어도 싶게 버릴 수 없는 생, 커다란 폭으로 마구 밀려 오는 우울증

오늘도 나를 버리는 법을 골돌히 생각 해 보다 마는 시간 - 설록


       



 

뒤란의 봄
---------------------------- 박 후 기



그 해 가을,
지구를 떠난 보이저2호가
해왕성을 스쳐 지나갈 무렵
아버지가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힘센 것은 모두
우리 집의 밖에 있다*

함석을 두드리는 굵은 빗줄기처럼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미군부대 격납고 지붕에서
땅으로 내리꽂힌 아버지가
멀어져 가는 보이저2호와
나와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질 무렵,

겨울이 왔고
뒤란에 눈이 내렸다

봉분처럼
깨진 바가지 위로
소복하게 눈이 쌓였다
주인 잃은 삽 한 자루

울타리에 기대어 녹슨 제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고
처마 밑 구석진 응달엔
깨진 사발이며 허리 구부러진 숟가락
토성(土星)의 고리를 닮은
둥근 석유곤로 받침대가
눈발을 피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겨울의 뒤란에는
버려진 것들이 군락을 이루며
추억의 힘으로 자생하고 있었으니,
뒤란은
낡거나 상처받은 것들의
아늑한 정원이었다

눈물이 담겨 얼어붙은 빈 술병 위로
힘없이 굴뚝이 쓰러졌고
때늦은 징집영장과 함께
뒤란에도 봄이 찾아왔다

울타리 아래 버려진 자루 속에서
썩은 감자들은 싹을 틔웠고
나는 캄캄한 굴뚝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 김승옥 소설 ‘염소는 힘이 세다’에서 인용.


* 위 시는 『시집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2006년 실천문학사 』에서 골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