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카
비틀을 알기 위해서는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박사와 폭스바겐(Volkswagen),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그리고 세계 제2차 대전을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을 발발한 장본인이 히틀러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유명 스포츠카 메이커 포르쉐를 세운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독일을 대표하는 폭스바겐사의 비틀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한, 이러한 배경때문에 포르쉐 박사는 종전후 전범으로 체포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1875년 9월 3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식민지였던 북부 보헤미아의 마페르스도르트에서 태어난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어릴 적부터 전기에 관심이 많아 15세가 되던 해 자기 집안에 전등불을 만들어 보헤미아에서 최초로 전등불을 켜 주위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1874년 세계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 지그프리트 밀커스의 자동차를 보고 자동차 설계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에게르라는 전기기계 제작소에서 조수로 시작하여 야콥로너사 시험부서의 지배인에 오르게 되었고 이곳에서 포르쉐 박사는 하이브리드카 개발에 참여하여 189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직접 만든 전기자동차 '로나 포르쉐 1호'를 선보여 그의 가능성을 대중 앞에 선보이게 됩니다. 그 후 그는 다임러사의 자동차 설계사로 근무하여 스포츠카 '샤샤' 등 우수한 경주용 자동차를 만들어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비행기 엔진 제작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쌓은 기술과 노하우는 추후에 그가 개발하게 될 모델들의 시초가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벤츠와 다임러가 합병한 뒤에도 그의 천재적인 능력을 통해 최고의 모델을 탄생시켜 우승의 역사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경영진과의 마찰로 끝내 회사를 떠나 독일의 슈트르트가르트에 개인 회사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때 생산된 모델 VW3은 좋은 결과를 얻어 프로토모델 VW30 30여 대를 추가로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38년 5월 26일 세계 최대규모의 자동차 공장인 독일의 볼프스부르크 공장이 히틀러가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열게 되었고 이 자리에서 기쁨의 힘이라는 의미의 "KdF"(Kraft durch Freude)란 이름을 달고 VW38 양산모델이 첫 출시가 되었습니다. 이 모델이 바로 비틀의 70년 역사의 첫 테이프를 끊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해 나치 정권은 포르쉐 박사를 강제로 독일로 이주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공랭식의 수평대향 4기통 1.1X 엔진에 RR 방식을 적용하여 장착하였고 바람의 저항을 줄이고자 딱정벌레와 같은 모습으로 제작된 KdF의 첫 출시 당시 히틀러는 처음 보는 이상한 디자인의 이 자동차를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뛰어난 성능을 보고 뒤늦게나마 만족해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또한, 트렁크 쪽에 엔진이 장착되고 뒷바퀴 굴림 방식인 RR 방식은 나중에 모든 포르쉐 구동방식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출시된 KdF는 국민차로 자리매김 하기도 전에 제2차 대전의 발발로 인해 군용차로 그 목적을 달리하여 생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쟁 기간동안 약 7만여 대가 만들어져 독일 나치군과 전쟁터를 누빈 비틀은 이후 전쟁이 끝나고 독일이 패망하자 연합군 국가인 영국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손상되고 이상하게 생긴 자동차를 생산하는 이 공장은 별다른 가치가 없어 보여 독일에 반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독일에서는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이 공장을 매물로 내놓았고 미국의 포드사에 제의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헨리 포드 2세 마저 직접 공장을 돌아보고는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절하게 됩니다.
그 후 독일에게는 국가 경제 재활과 전쟁 피해국들의 보상금 해결이라는 두가지의 숙제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과 국민은 부서진 공장을 재건하기로 합의했고 당시 BMW의 기술자를 거쳐 오펠의 간부로 재직 중이던 노르트호프에게 회사의 경영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KdF로 불리던 모델에 국민차라는 의미의 "폭스바겐"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했고 그는 탁월한 경영능력으로 다시 회사의 재건에 힘써 1950년대에는 전쟁 이전과 같은 수준으로 생산능력을 끌어올렸습니다.
노르트호프는 회사의 장래는 수출에 있다고 판단하여 수평 대향 4기통 1.1X 25마력 엔진을 장착한 폭스바겐을 수출하기로 마음먹고 미국 시장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소음이 심하고 자국 모델을 사랑하던 미국 국민에게 이상한 모습의 폭스바겐은 별다른 인기가 없었고 1950년대에 겨우 150대 판매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르호프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다른 기업들과 차별화된 경영과 뛰어난 내구성을 바탕으로 미국 시장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고, 1960년대에 들어서는 연간 20만대 판매라는 높은 기록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딱정벌레를 닮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디자인 덕분에 비틀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후 미국보다 더 큰 성공을 유럽시장에서 거두기 시작하여 폭스바겐과 독일은 전쟁의 상처를 털고 재건할 수 있었고 1978년을 기점으로 독일 현지 생산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