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방/오늘의 생각

작년의 가을

은빛강 2010. 10. 25. 20:59

계절은 자연의 흐름을 움직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마음도 과거의 어느 지점, 그곳에 정확하게 옮겨다 놓는다.

초점 안에 들어오는 사물의 위치에 따라 해가 뜨고 지는 그라데이션의 그 속까지

홀연히 나선을 그으며 땅 위로 내려앉는 잎새 하나 까지

그리고 울리던 전화 벨 소리가 명치끝에서 멈춘 시간까지

자연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작년 이 시기 즈음에

나의 하루 일과는 새벽에 계산동 주교좌성당으로 새벽 낙엽 냄새를 맡으며 걷고 있었고

중환자 대기실에서 환자들의 가족들과 기숙사 같은 생활을 했다.

정확히 10시가 되면 아버지를 면회하러 들어갔고

아무런 의식도 없는 아버지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말을 건넨다.

동생들 이름 중 가장 보고 싶어 할 아이의 이름을 불러 드리면 힘없이 내 손을 꼭 잡으셨다.

더러 아버지 침상 주변으로 검은 고무주머니와 누런 고무주머니를 보면 얼마 되지 않아 급히 호흡을 되돌렸다는 사실과

아주 더러는 가슴에 충격을 주는 물리적 기계가 내가 들어가기 전에 치워지지 않는 상태라면 아버지는 몹시 지쳐 있었다.

 

처음 중환자실에 들어가실 때 하루 이상은 가망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내일 즈음엔 육신을 거둘 준비를 하라는 이면의 말도 된다.

그렇게 단정 지어진 환자들은 사실 하루는 빠르게 또는 하루 늦게 차가운 주검으로 흰 시트를 가리운 채 집중치료실에서 밀려 나왔다.

아버지는 그동안 척추디스크 수술을 받았고 그 이후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이웃 대학병원으로 호송해서 심장수술을 하셨다.

시간이 흘러 차츰 병이 호전되자 다시 혈액 암으로 일산 암센터에 입원을 하셨다.

언제나 늘 상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다보니 더러 나의 할일을 놓쳐 버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다시 골절상으로 입원을 하셨을 때, 나는 동생들에게 양보 했다. 일종의 형제 자매간 보상심리였다.

동생들은 시댁의 눈치도 있고 그래서인지 잘은 모르지만 환자를 관리 해 주는 간병인에게 일임을 했다.

아무튼, 잘잘못을 논하기 전, 나의 심기 불편으로 결국 아버지는 내 집과도 먼 대구에 있는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모셔졌다.

어머니의 전화 한 통화를 받고 캐리어에 일상 짐을 마구 쓸어 담아서 내려갔다.

이제까지 그 중요한 수술도 다 이겨 넘겼는데, 감기로 중환자실에 계신다는 것이 말이 안 되었다.

간병인이 누워 있는 환자에게 유동식을 마구 퍼 넣은 것과 환자를 씻기고 대충 정리하며 방치 해둔 일로 감기와 패에 물이 찼다.

일종의 패에 염증이 생긴 패렴 인데, 연로하신 환자들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병의 일종이다.

혈액에 곰팡이 균이 서식하면서 급속도로 전염이 된다. 평소 건강한 성인에게도 혈액에 균이 서식은 하지만 건강하기에 그러한 균은 소멸이 쉽지만 건강하지 못한 유아와 노령인 들에게는 생명에 위협을 주는 세균이다. 

아무튼, 아버지께서 의식이 조금이라도 계셨으면 방임 할 일들이 아니었다.

당신이 약 업으로 한 평생 사신 분이니 결과를 알기 때문이다.

그즈음에 약물에 거의 취해 계셨다고 했다.

그 점을 두고 속상해 하면 동생들 입지도 곤란하고, 나 역시 나중에 스스로 깨달은 것이지만 모든 것이 나의 탓이었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보내며 먼 친척 되시는 의료인은 가능하면 집으로 모셔서 조용히 임종을 하라는 운을 뗐다.

그리고 그는 세미나로 일주일 외국으로 나갔다.

나는 매일 새벽과 낮에는 성당엘 갔다.

그렇게 내 생애 처음 보이지 않는 힘에 그렇게 의존하며 보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열흘 즈음 되어서 눈도 뜨시고 의식이 돌아 오셨다.

해서 가족모두 불렀다. 아마도 혹 마지막이 아닐까 싶어서......,

그런데 의외로 담당의사진들이 신기 해 하며 열심히 치료 해 보겠노라 했다.

그리고 32일 되던 날  투석기를 돌려도 매양 같고 해서 주치의와 많은 대화를 했지만 결론은 내가 내려야 했다.

나는 지금 것 살아오면서 더러 주검 앞에서 있어 봤지만 내 아버지의 생명 앞에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게 지금까지 괴롭고 힘든 일이 되었다.

투석기를 돌려도 온몸이 부은 아버지는 그냥 바라보기에도 안쓰럽기만 했다.

하루 종일 물속을 쏘다니듯 한 몸으로 아버지의 투석기를 제거하는 일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가 내렸고 가족들을 모았다.

가슴이 뛰고 있어서 귀를 바싹 대어 보았다.

그것은 기계가 움직여 주고 있었다.

모두들 울고 있었다. 나는 눈물이 나질 않았다.

장례를 치루고 삼오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자리를 펴고 누웠다.

인생의 마지막 가는 길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란 걸

늘 시장의 생선처럼 파닥거리고 살아도 숨을 놓으면 아무것도 아니란 걸

그리고 내가 다하지 못한 일들에 지금 것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들

절대 후회 할 일은 만들어서도 남겨서도 안 된다는 것,

아무튼 여러 가지 생각들이 줄줄이 생각이 나지만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것, 무기력이 고단하게 내 몸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얼마 전에 남동생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이미 아버지는 가시고 있는데 못난 나 때문에 친척인 의료인이 그냥 두었다는 것,

나는 그 의료인에게 무한한 유감을 안고 있었다.

지금 생각 해 보니 그분 나름대로 고생하고 생각 해 준 뜻이 잠시 오해로 남았다는 것,

겨울이 다 가도록 아마 나는 그렇게 작년처럼 아직은 지낼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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