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방/오늘의 생각

봄 손님

은빛강 2011. 2. 20. 06:28

 

봄 손님

박 찬 현

폭설의 피해가 연일 꼬리를 물고 가는 겨울 속에 봄은 물오른 싱싱함으로 그 속에 서있다.

'홀로코스트'나 다를 바 없이 산목숨 들이 생매장을 당한 이승의 지옥 위로 한이 맺힌 어미 돼지와 소들이 울부짖으며

어린 생목숨 절명을 허공에 가슴을 찢어발기듯 그렇게 울고 있다.

어느 사진작가의 앵글에 잡힌 오로라가 지금 이 땅에 일어나고 있는 '홀로코스트'의 영혼들을 대변 해주고 있음이다.

매년 봄비에 춘화들이 천지를 덮듯이 무더기로 낙화 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토록 무죄한 가축들이 생목숨을 지옥처럼 건너가는 길목 앞에 무거운 안개가 자욱하다.

요즘엔 시간의 손목을 잡을 수 없이 빠르게 스쳐간다.

아마도 축생들의 불행 앞에서 삶을 정리 해 보라는 메시지 같이 느껴진다.

가축들의 대량 학살 뒤, 그 주검들이 매장 된 땅 위로 치솟았다는 소화하기 거북한 뉴스를 접한 후, 

그러고 보니 근간에 그렇게 간절하게 마음을 이끄는 것들이 없었다.

그냥 하루가 지나고 내일이 와도 시간의 뒷모습조차 기억에 없다.

'함께'라는 가족의 의미도 무의미 해 지는 것은, 그동안 삶에 지친것도 있겠지만

각자의 삶이 그들의 몫이기에 구차하게 개입 할 여지가 못 된다.

한생을 왜 사는가, 라는 의문이 자주 드는 요즘, 한 술 더 떠 서 '나는 누구인가,'란 맹랑한 생각의 늪에서 허우적인다.

아름답게 포장된 삶들을 관람을 할 때도 무의미함 한 줄기 머리 속을 휘돌고 나갈 뿐,

 

 

밤새 아픈 어미 개를 돌보다 잠간 잠이 들었다가 인기척에 옅은 잠은 이미 멀리 사라지고 없다.

어미 견이 강아지를 낳을 때 도 며칠을 지새우고, 몸이 약해 경련을 일으킬 때 도 동물병원 응급실(의사를 깨움)로 가서

링거를 맞고서야 회복을 했던 어미 견 '새롬이' 를 돌보다 강아지가 성장을 하게 되면서 의당 애정은 강아지들에게로 온전히 쏠리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이 아이는 자기가 늘 아가인줄 안다.

그런 요즘 이 어미견이 아프다.

내가 아이 하나를 간신히 낳느라 생사를 헤맸던 시간은 생애의 기억 한 부분으로 남은 지금,

갱년기를 맞이한 어미 견을 이해를 하기란 매우 쉬운 일이다.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을 우리는 '가축' 또는 '반려동물'이라 칭한다.

내 엄마는 전화를 할 때 마다 '건강에 안 좋으니 강아지들 버리든지 누구를 주라.'라고 추신으로 간절히 따라 온다.

대답하기에도 좀 귀찮고 해서 그냥'그렇게 하겠다.'고만 한다.

 

 

오래 전 이웃에 가수'권혜경'선생님이 사셨다.

그분은 혼자 사시면서 온 동네 유기 견은 죄다 주워서 온갖 정성을 기울여 그들을 돌보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집에 들르면 수많은 유기 견들이 좁은 마당 안에서 선생님의 훈육을 들으며 놀고 있었다.

물론, 그분은 소년 감호소를 드나들면서 그들의 뒷바라지도 해 오셨다.

그러한 마음으로 집도 절도 없는 유기 견들을 거두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어느 비가 오던 봄날 새벽 미사를 다녀오는 길에 내 집까지 따라 온 강아지를 거두어 돌봤을 때, 권 선생님이

내 집에 들르셨다가 그 아이를 데려 가셨다. 이름은 '봄비'이다.

가끔 '봄비'가 잘 있는가 싶어 가서 보면, 노랑 개나리 담장 아래서 건강하게 뛰어다니며 잘 크고 있어

안도의 마음이 놓였던 기억 한 장이 머무른다.

 

그 분도 가시고 없는 하늘 아래 많은 사연을 가진 따스한 이들의 이미지도 흐려져 사라진 지금,

나는 고통의 질주를 하는 편두통에 사로잡혀 사해를 지나는 기분이다.

언어도 어눌해 지고 기억도 희미해지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실종 해 버린 층간에서

비릿한 '홀로코스트'의 주검 냄새를 코끝으로 느낀다.

그런 겨울이 지금 가고 있는 그 행간에 오시는 봄 손님을 맞이하기에 면구스럽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