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詩하늘 詩편지

'좋은 시·아름다운 세상' 『詩하늘』詩편지

은빛강 2011. 9. 30. 08:26

 

 

 

 

 

'좋은 시·아름다운 세상' 『詩하늘』詩편지

 

 

 

종이컵

 

홍문숙

 

 

도서관 자판기, 종이들은 불면으로 가득 차 있다

밤새 지식들이 비워댔는지

어떤 컵은 격렬한 고뇌를 받아낸 흔적이 역력하다

맨 밑바닥까지 벽을 타고 내려가다 굳은 갈색

의중으로 보아 그는 몇 걸음 타협 쪽으로 혹은

넥타이를 고쳐 조이며 무채색 고집을 새겼으리라

컵이란 게 다 바람의 운명 같아서

다시 담거나 비우지 못할 저 종이컵이야 말로

仙者의 풍모 아닐까

제 몫의 피곤과 우울로 쥐어진 채

하얗게 표백된 부피로 서성거렸던 건

지난밤으로 족하다

입술 가까이 슬그머니 묻은 초조를 자르르 적셔주며

누군가 딸깍, 또 다른 갈등 하나 맛있게 뽑는 소리를,

 

나는 도서관을 들어서며

한 모금의 커피와 따끈한 지식 몇 줌

책갈피에 숨긴다

 

 

 

-시집『눈물의 지름길은 양파다』(차령문학, 2009)

-사진 :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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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발명인지도 모른다

삶에 유용하게 쓰이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치부할 수 있겠다

자원이란 유한해서 쓰기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진다

대체로 사용 뒤에는 그냥 버려지거나

구겨진 채 버려지는 게 대부분인데

재활용이라는 개념으로 본다면 또 달라진다

잠을 좇아내며 공부하느라

커피 몇 잔이라도 비웠을 텐데

그 와중에 종이컵이 겪어야 했을 모습들이

아름다운 상상으로 다가온다

지식인들에게서 받았을 종이컵의 수모도 더러 있었을 터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기를 기대해본다

 

 

 

                            詩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