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다락방

오늘의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

은빛강 2016. 8. 19. 11:47

 

<오늘의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

2016년 8월 19일 금요일

(고인현도미니코신부님)

 

<교부들의 말씀 묵상>

가장 큰 계명(마태 22,34-40)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며, 그분께 배우겠

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진정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이다. 제자만이 합당하게 그분을 ·스승님’ 이라고 부를 수 있다(오리게네스). 바리사이들은 무리의 힘으로 그분을 이기려고 한데 모였다. 합리적인 논증으로는 그분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와 대면한 그들은 무력한 존재임을 드러낸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그리스도께서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는 그들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특별히 더 중요한 계명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주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가장 큰 계명일 뿐 아니라, 첫째 계명이기도 하다. 하느님께 대한한 사랑이 가득한 마음과 지식의 등불로 환하디환한 빛을 받는 영혼과 하느님의 말씀으로 가득 찬 정신을 지니고서 하느님의 지혜안에서 즐거워하는 사람, 자신이 받은 모든 은사에서 확인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 탈출기와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쓰인 말씀들은 모두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두 계명 위에 서 있다(오리게네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선의 바탕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영적독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기도, 안드레아가스파니로 지음

21 요점

 

10.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올바른 뜻과 결단을 요구한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만으로도 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좋은 포도주의 맛을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병 마개를 열어놓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 안에서 게으름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11. 설령 우리가 방법과 형식의 한계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잘 조직된 버팀목이 필요하다. 의지는 방벽과 선로와 방식을 필요로 한다.

 

12. 사람은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없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확인된 바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에서 이성에 따른 추론에만 의존한다면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즉 생각과 말은 하느님께 마음을 모으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13.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첫 열매는 우리가 기도를 할 줄 모른다는 사실과 기도에서 항상 위로만을 쫓아다닌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기도란 자신을 사랑스럽게 주시하는 영혼의 주의력이다. 유의하면 할수록 사랑이 충만하게 되며 더 나은 기도를 하게 된다.”(P. 드 푸코)

(133)

 

<성무일도 청원기도>

주님께 의탁하는 사람에게는 혼란이 없사오니,

― 겸손한 마음으로 통회하는 우리를 받아들이소서.

◎ 주여, 우리 안에서 행하신 바를 보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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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도 다락방 8월 성령 열매 성월>

<3주간 기쁨/선행>

108주간/15주간 티모테오 1/2서간 전부

 

<금요일 성인의 날>

하느님께 대한 증오는 하느님께 대한 반역을 명백하고도 완전하게 나타내기 때문에 가장 큰 죄이다. 증오는 중대한 죄중의 하나는 아니다. 왜냐하면 중대한 죄들은 다른 여러 죄들의 근원이 되지만 증오는 덕을 뒤집어 엎는 근원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오는 그 출발점이 된다. 각자는 슬픔을 피하고 기쁨을 추구한다. 이러한 기쁨에서 사랑이 나오고 슬픔에서 증오가 나온다.

 

종교는 여러 윤리덕 중에서 가장 으뜸되는 덕이다.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 관계되는 일들을 신속하게 하려는 의지인 신심은 의지적 특수행위이다. 묵상이란 우리에게 신적 선성을 드러내고 우리의 비참함을 알려주면서 의지를 행한 길을 열어주는 지성이기 때문이다. 신심의 효과는 신적 선성에 대한 사고를 통해 드러나는 기쁨과 우리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사고를 통해서 오는 희망과 연결되는 슬픔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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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현 도미니코 OFM)